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 2 추사가 살던 시대는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으로 추사 역시 유학을 기본 골격으로 다져진 名門世家에서 양육되었다. 그가 비록 명문의 權門勢族이었으나 평생을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배움의 끈으로 일상을 쓰임있는 그릇으로 실용의 삶을 산 연유는 앞의 서술, 율곡의 “일상에서의.. 秋史 사랑채 2018.09.17
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 1 2 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과 學緣의 영향.hwp 2. 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과 學緣의 영향 최초 삶의 현장인 가정에서의 養育 의미에는 당연히 敎育이라는 뜻이 함의 되어 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가족 구성원들과 그 주변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은 가정을 벗어.. 秋史 사랑채 2018.09.1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8 추사가 죽기 3일 전에 쓴 “七十一과 病中作”이라 부기한 최후 명작, 絶筆 <板殿>은 봉은사의 화엄경판을 보관하기 위해 지운 경판전의 현판이다.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7 전 참판 김정희의 졸기 전 참판(參判) 김정희(金正喜)가 졸(卒)하였다. 김정희는 이조 판서[吏判]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총명(聰明)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草書)·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6 추사는 허화로움의 가치를 山陰雪棹의 고사, 밤눈이 개인 달밤에 王獻之가 달빛을 타고 벗 戴逵를 만나러 갔다가 대규의 집이 바라보이는 강가에 다다라서는 굳이 대규를 대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냥 돌아와버린,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을 뿐, 어찌 꼭 만나야 그 흥..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5 과지초당은 1824년, 추사는 39세로 규장각 대교로 재직하고 있었고, 김노경은 59세로 대사헌. 이조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쳐 한성판윤 재직 시, 추사가가 번창하고 있을 당시,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있는 야산과 밭을 구입하여 조성한 별서로, 園林과 연못을 갖춘 자못 아름다운 작은 집..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4 제주 귀양살이 시절에도 동생들이 추사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면 의아하다고 策을 하여 명희, 상희를 난감하게 하였을 터인데, 북청에서도 추사의 박학독행의 학구열은 여전하여 현재도 그 먼 외지 제주나 북청에 책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 즉, 이를 감당하는 이들의 속 끓음이 어지..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3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추사는 자신이 창출하고자 하는 서체를 찾아서 法古의 나들이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銅鏡, 銅錢 혹은 화첩의 山水, 人物, 四君子 등을 감상하며 그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며 역사 속의 시간을 거닐며, 시.공간을 초월한 그 시간, “과거와 현재가 통합되는”,..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2 또한 추사는 북청 유배시기에 황초령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영구하게 보존토록 조치를 취하여 순수비의 서체를 후학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역사. 금석학자로서 공헌을 하였다. 추사는 이십여 년 전인 1832년 47세 즈음,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부임해갔을 때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 秋史 사랑채 2018.08.27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1 그리고 호암미술관에 소장에 되어 있는 <石砮>는 20세기 전반기의 감식안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추사의 북청 유배시기 대표작으로 오세창이 쓴 표제와 여러 명사들, 권돈인을 비롯하여 김돈희, 김용진, 정인보, 오세창. 안종원. 이시영 등의 발문과 시들이 記載 되어 있다. 이 <石砮&g.. 秋史 사랑채 2018.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