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3

clara jeon 2018. 8. 27. 20:50

   이를 쉽게 풀이하자면 추사는 자신이 창출하고자 하는 서체를 찾아서 法古의 나들이를 하였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銅鏡, 銅錢 혹은 화첩의 山水, 人物, 四君子 등을 감상하며 그 속으로의 여행을 즐기며 역사 속의 시간을 거닐며, 시.공간을 초월한 그 시간, “과거와 현재가 통합되는”, 창조가 절차탁마되는 시간들 속에서 자신의 현재의 자아의 세계와도 소통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형상화되어지는 작업과정에서 그 상징들은, 하나 하나의 점과 획들의 붓질들은 자신이 처한 유배 삶의 고통의 시간들을 각성하게 하고, 새로운 각오로 고통을 넘어선 정화, 승화된 삶의 세계를 시로 글씨로 그림으로 재정립하였을 것이다. 그 가다듬질되며 창출되어지는 예술의 경지, 法古創新. 格物致知. 實事求是가 추사만의 “體”로 詩書畵명작으로 오롯하게 탄생된 것이다. 이를 다시 더욱 더 쉽게 풀이 하자면 이동주는, 원로석학 말씀답게 평범한 얘기 중에 사안의 핵심을 꿰뚫는 깊은 인식이 깔려 있는, 추사는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쓸 수 있었다.”하였다.([완당평전].2, p467)

많이 썼을 거예요. 아마도 심심해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쓰고 싶어 쓰고, 마음 달래려고 쓰고..... 그 실력과 그 학식에 그렇게 써댔으니 일가를 이루지 않고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완당이 제주 유배지에서만 그렇게 썼냐 하면 그렇지가 않았죠. 아시다시피 평소에도 좀 많이 썼습니까. 또 글씨 주문은 좀 많았습니까.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제주도에서도 왕이건 친구건 제자건 관리건 주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별로 문제 되지 않았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계기가 추사체의 비밀이겠죠.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는 것,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썼건 그걸 쏟아내려고 썼건, 원래 예술로서 글씨란 남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누가 뭐랄 사람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깐 그런 괴이한 개성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추사는 북청 유배시절에도 제주 유배 때와 마찬가지로 법고창신의 명작들을 다작하였고, 명작들의 골격, 밑바탕이 되는 독서로 격물치지하기 위하여 많은 책을 집에서 가져다 보았는데, 수시로 집에 있는 책을 찾아서 보내줄 것을 아우 상희 명희에게 요구, 천리 밖에서 집안 어디 어느 구석에 보면 무엇이 있다는 추사의 치밀함과, 도무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집안 사람들의 어려움이 항시 교차하고 있어서 뛰어난 분을 뒷바라지하는 주위 사람들의 노고가 어떠하였는지,([완당평전] 2, p627) “明나라 말기 流民에 관한 일은 그래도 여기에서 상고할 만한 것이 있는데...”로 북청 유배시기의 서간문임을 알 수 있는 다음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文編>에는 과연 재미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네. 그러나 누구와 함께 맛볼 길이 없어 혼자서 보아 넘기노라니, 또한 무슨 맛이 있겠는가.
그리고 <磊磊落落書>는 집에 謄寫本 이 있으니, 바라건대 나중에 오는 인편에 찾아 부쳐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明나라 말기 流民에 관한 일은 그래도 여기에서 상고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 거칠고 잡란스럽기가 매우 심하고 또 소루한 곳도 매우 많네. 그러니 또한 어찌하겠는가. 대체로 著書하기 어려움이 이러한 것이 있네.
中庸說이 있다는 말은 일찍이 들었었는데, 이제 그 설을 보니, 역시 천고에 발명되지 못했던 뜻을 밝히어 두루 잘 다스려놓았네. 그러나 예전에 누가 이 설을 해놓았을 경우, 만약 淸山의 무리가 이것을 보았다면 또 일어나 쟁론을 하려고 했을 것이네.
曆書는 넉넉히 들여다 쓸 만한데, 또 若干卷이 남아있을 것이네. 그리고 만일 七政曆이 오거든, 보내는 대로 貼粘하여 오는 대로 보내주면 될 것이네. 어찌 꼭 早晩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藝海珠塵 가운데서 뽑아놓은 책 한 권은 곧 <中星表> 1권인데, 兒輩가 이를 收取해 놓았는지 모르겠으나, 요즘의 인편에 부쳐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唐空帖 3권은 그대로 도착했으나, 이 책이 이 3권 뿐만이 아닌데 다만 3권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괴이하고 의아스럽네. 당공첩과 한데 두었던 唐扇은 과연 아무 탈 없이 숫자대로 다 있더라던가? 또 10권 1匣으로 된, 지금 여기에 온 것과 같은 공첩이 江上樓 가운데 종이로 바른 긴 文匣 속에 들어있는데, 이것 또한 收藏해 두었던가?([완당전집], 書牘 <與舍季相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