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1

clara jeon 2018. 8. 27. 20:42

그리고 호암미술관에 소장에 되어 있는 <石砮>는 20세기 전반기의 감식안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추사의 북청 유배시기 대표작으로 오세창이 쓴 표제와 여러 명사들, 권돈인을 비롯하여 김돈희, 김용진, 정인보, 오세창. 안종원. 이시영 등의 발문과 시들이 記載 되어 있다. 이 <石砮>는 시와 書만을 의미하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추사가 유배할 무렵에는 북청 곳곳에서 석노라고 부르는 돌화살촉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숙신의 유물이라는 (요즘 고고학과 미술사식으로 말하면 청동기 시대 유물로 대개 기원전 5세기 무렵, 즉 고조선 말기이니 그때의 북청지역이라면 당연히 숙신의 유물이라 고증하고 있는) 추사의 정확한 판정이 함의되어 있는 長時이다.([완당평전],2, p640) 추사는 이 시를 짓는 이유를 “石斧. 石钃이 매양 靑海의 土城에서 나오는데 土人들이 토성을 肅愼의 고적으로 여기기에 이 시를 짓는다”라 하였다. 이 시 역시, 추사가 동경한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의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조영, 윤관, 주몽 등과 對比되는 實在하는 石斧. 石钃의 詩材로 인하여 오히려 浮刻되어지고 있다.

형. 양의 옛 직공에 다 노를 바쳤으니
우의 때에 돌로 병을 만든 일을 있었던가
숙신이라 석노는 대개 우와 연관인데
우의 노는 마침내 중토에 전함 없네
거말이나 좌과는 예서 제서 얻었으되
악작이랑 양고석은 보질 못했거던
공자의 세상에도 역시 이건 없었으니
수리 노를 띠고 와도 사람들이 몰랐거든
이 일은 황당하여 가장 믿기 어렵고야
노를 띠고 어떻게 먼 데를 날아오리
개마산 남쪽이라 일천 리의 지역에는
낙랑 진번 서로를 글타거니 옳타거니
산천의 도기에도 이 증빙이 다 없는데
전설을 또 받아들여 숙신씨라 일컫누나
대개는 돌도끼나 아울러 돌촉들로
청해의 언덕에서 오다가다 얻는다네
부는 바로 이와 같고 보형과는 다르지만
촉은 분명 어복에서 나온 것 같군그래
돌 성질 금강과 맞설 만큼 날카롭고
돌무늬는 일고 일어 고록이 무리졌네
삼백 매가 있어 혹은 직공에 채웠는데
직공에 채웠을 뿐 용 만든 건 아니었네
발해 임금 대씨나 윤 시중을 보더라도
이 도끼 이 촉으로 싸움 승리 못 들었네
가소롭다 그 당시 오아속 이라던가
치우 호로 따위는 애들 장난 마찬가지
이 도끼 이 촉 정말 숙신의 물이라면
동이들은 대궁에 능하단 게 상상되네
토성의 옛 자취도 정해지지 못했거늘
이를 얻어 다짐하면 오히려 강통일레
돌 스스로 말을 않고 또 관마저 안했으니
야뢰의 산 빛깔이 속절없이 아득아득
긴 손톱의 질서도 역시 어긋지지 않고
장평의 화살머리 옛 피가 붉었다네
기린이라 조천석 그보다는 썩 나으니
베 폭 같은 강빛에 와전된 주몽일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