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9

clara jeon 2018. 8. 27. 20:36

학예인으로서의 삶을 自暴自棄하거나, 배우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평생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 그 긴장을 놓지 않고, 박학독행 평심정기하여 格物致知하는, 이처럼 박학한 지기지우를 권돈인은 自矜하며 평생지기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완당전집], <書牘> 편에는 추사가 권돈인에게 보낸 서찰이 무려 서른다섯 편이나 되는데, 대개가 위의 서간문처럼 학구적이다. 특히 제2신에는 이들의 진지한 나눔의 友情을 엿볼 수 있는 글귀가 있는데 이재가 “끊임없이 왕래하면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르리라”에 대해 얕은 견문으로 설하였는지, 추사는 이재의 오류를 지적하였지만 다독이며 다음과 같이 화답, 평생 학예를 知音志交한 이들의 우정이 예견, 전문을 옮긴다.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말에 대해서 지금의 설자들로 말하자면 이를 마치 私意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듯한데, 그렇다면 원문의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으리라.’라는 데에 대하여, 부자가 일컬은 ‘귀착점은 같되 길은 다르며, 이룸은 하나이되 생각은 백이나 된다.’는 말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겠습니까?
함괘의 초륙과 육이는 도를 잃은 것이기 때문에 구사의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항괘 . 익괘 . 손괘와 변통하여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다.’는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것을 사사로운 뜻으로 본다면 그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으리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상전에 이르기를,
“끊임없이 왕래하는 것은 광대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광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왕래하여 광대한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대하지 못한 것은 곧 도를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것을 가지고 곧장 광대하지 못함의 뜻으로 삼아 버린다면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다.’는 것은 문득 붙일 곳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두 손 모아 기축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합하의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데에 대한 뜻이 크고도 지극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더 항괘. 익괘. 손괘와 변통하는 뜻에서 깊이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다.’는 것을 이루게 된다면,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소멸되는 것이 또한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凡人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들었을 추사의 심오한 起承轉棙의 가르침에 권돈인은 999의 노력을 다하고 나머지 일분까지도 노력으로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소멸”될 수 있도록 심신 수행의 最善과 最先의 학예를 겸비, 揭示한 정치인으로 입지하였을 것이다. 스승이자 동료인 추사와 이재의 평생배움길에서의 나눔은 다음 장 2. 流配 以前의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5) 學友에서 세세히 논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