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8

clara jeon 2018. 8. 27. 20:31

예순여섯, 추사는 “더러운 세속에 동화하지 않는 결과”의 삶, 안외순이 논문의 말미에 간파한 “권력은 짧고 학예는 길다”(안외순,<추사 김정희 가의 가화와 윤상도 옥사>,[추사연구]4호 .p301)를 이미 제주의 귀양살이에서 체득한 바, 평생지기 지기지우인 이재에게 위안을 주고

古人들도 易詞를 注釋하거나 藥房을 抄錄하는 일은 모두 이 무료한 곳에서는 없을 수가 없었으니, 한가로운 日課나 부질없는 흥취도 一段의 걱정 없애는 것만 될 뿐이 아닙니다. 白雲洞과 浮石寺의 좋은 경치는 조용히 탐방할 만하거니와, 安文城의 芳風은 遊塵을 쓸어버릴 만하고 周愼齋의 뛰어난 氣像은 심지어 이끼 낀 壁, 갈라진 틈새의 글자까지도 魑魅를 制伏시킬 만하니, 百世 후에서도 그의 風彩를 거슬러 올라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나간 옛일을 추모할 수 있고 像季를 感發 시킬 수 있는 것이 더욱 절로 말 수 없게 되었습니다.....([완당전집],1, 제3권, 書牘, 與權彝齋 敦仁, 二十六, p269)

그리고 이어 추사는 董其昌, 覃幀, 八大山人, 文五峯, 文衡山의 書軸이 추사의 예리한 金剛杵 眼目과 酷吏手의 감정으로 眞筆인지 僞筆인지를 論旨하고 있다. 추사의 考證의 格物致知 경지가 凡人으로서는 도저히 들여다 볼 수도 없는 山崇海心인지라 그 일부를 발췌한다.

    동기창의 서축은 이것이 또 대단히 좋습니다. 필획마다 모두 중봉을 운용하였습니다. 동기창 필획의 강력한 흔적이 이와 같은 다음에야 동기창의 진서는 보통 글씨들과 비교할 수 없으며 동기창이 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망녕되어 용렬한 세속 사람들은 이런 절묘함이 있는 것을 모르고 동기창의 필법을 함부로 헐뜯고 있으니, 동기창의 필법이 왕희지의 정통에서 나온 것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담정은 그 상단은 진필로서 바로 그 60세 이전인 중년 시절의 필적입니다. 그러나 하단은 진필이 아닙니다. 가짜를 조작하는 자들이 해외에도 식견을 갖춘 한 노인이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삼가 조소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 하단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으니, 즉시 깍아버리게 해서 물고기의 눈깔이 구슬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욱 좋겠습니다.
팔대산인의 그림은 거듭 열람해 보니 진필이 아니었습니다. 화법은 진실로 아름다우나 習氣를 퍽 띠었습니다. 팔대산인의 그림은 원래 아무런 흔적을 찾을 데가 없는데, 어찌 습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오봉의 화권은 썩 아름다와서 본가의 풍채를 잃지 않았고, 제관 또한 그의 수적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문형산의 서원축은 이와 같은 것이 또한 많은데, 필법은 각초함이 약간 부족하기는 하나, 보통 글씨로 가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서원축의 맨 끝에는 심초원정방의 소인이 찍혀 있으니, 심씨의 옛 소장품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심씨는 바로 담홍의 선배인데, 풍류와 문채가 한 시대에 빛나서 담옹께서도 매우 중히 여겼던 분이니, 그가 기필코 가짜 작품을 수장했을 리가 없습니다.([완당전집],1, 제3권, 書牘, 與權彝齋 敦仁, 二十六, p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