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7

clara jeon 2018. 8. 27. 20:28

우리는 12일에 회양을 출발하여 물이 가로막은 곳과 지극히 위험한 지역을 어렵게 건넜다네. 작은 시내가 어깨를 넘고 이마까지 잠기는 깊은 물도 평지처럼 지나왔는데, 큰 내는 무릇 28곳이나 건넜고, 보통 소소한 냇물은 일일이 셀 수도 없네.
20일에 비로소 함흥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렀는데, 또 비가 내려 더 나아갈 수 없었다네. 갈 길이 사흘 일정밖에 되지 아니하여 22일엔 비를 무릅쓰고 나아갔는데, 곳곳에 물이 불어 길을 막았네.
26일에 비로소 이곳에 이르렀는데, 북청읍과의 거리는 5리 남짓 남았다네. 큰 내는 배를 건너고 작은 내는 어렵게 건너 일행이 東門 안 裵氏 집에 다다라 지금 兵營의 조치를 기다리고 있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일행의 위아래가 이제 겨우 정신을 안정하게 되었네. 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역시 하늘의 보살핌일 뿐이지! 이 몸은 다행히 큰 탈은 없다네. 며칠 쉬니 머리가 흔들릴 뿐이네. 길을 떠나려 하면서 회신하니, 모든 일을 억지로 하려 하지 말게.
지금부터 나흘 뒤에 비로소 병영에 갈 것 같네. 뒷날 다시 쓰겠네.......
신해년 윤8월 초 이틀 귀양살이하는 큰형이([완당평전]2. p.609-610)

“모든 일을 억지로 하려 하지 말게.”라고 방축되어 마음이 慌忙할 아우들에게 당부하는 예순여섯의 伯累, “귀양살이하는 큰형” 추사의 마음 역시 암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더 이상 꺾어지지도 꺾을 수도 없는 경지, “곤궁하거나 현달함에 개의하지 않고, 죽고 사는 것을 한 가지로 보아 담박”([완당전집],1 정인보, <완당선생전집서>, p3)하게 초탈, 그 무엇도 추사의 삶을 흔드는 장애가 되는 것은 없었다. 윤상도 옥사로 인한 국문 시에도 추사는 “옥사가 일어나 말이 공에게 관련되어 의금부의 군졸들이 황급하게 움직이자, 공을 위해 걱정하는 이들이 모두 두렵게 여기었다. 그러나 공은 행동거지가 평소와 똑같았고, 법관을 대해서는 요점을 잘 지적하여 변석하니, 그 준엄하고 명백한 기상이 日星을 능가하고 金石을 꿰뚫을 만하였다.”([완당전집]1, 민규호, <阮堂金公小傳>, p11) 추사의 이러한 굽히지 않는 初志一貫의 浩然之氣는 그의 집안의 가훈인 “곧바른 길을 행하라”를 실천한 삶의 자세, 즉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 그의 心地의 “直道以行” 深淵의 흐름일 것이다. 추사의 “곤궁하거나 현달함에 개의하지 않고, 죽고 사는 것을 한 가지로 보아 담박”([완당전집],1 정인보, <완당선생전집서>, p3)하게 초탈”한 삶의 모습은 권돈인이 안동김문 일파인 삼사의 합계로 낭천의 중도부처 3개월 후 경상도 순흥으로 移配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위로한 서간문에도 드러나 있는데, 글의 내용이 자신의 굴곡진 삶과 그러한 삶을 지켜온 信條 , “直道以行”의 의미를 含意하고 있다.

“끝없이 변천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잡아 정할 수 없는 것이니, 비록 백 번 천 번 변환하는 가운데 閬風 . 懸圃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편안한 대로 하고 어떤 사물의 부린 바가 되지 않는 그것이 바로 君子의 跟脚을 세우는 것이니, 뭇사람들처럼 이리 저리 정처 없이 떠돌면서 더러운 세속에 동화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결과입니다.([완당전집],1, 제3권, 書牘, 與權彝齋 敦仁, 二十六.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