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0

clara jeon 2018. 8. 27. 20:38

   추사의 유배의 삶은 그곳이 絶海孤島이든 遠惡地 궁벽한 곳이든 이러하였다. 추사는 제주에서도 자신의 학예를 切磋琢磨하며 絶海孤島 궁벽한 환경으로 인하여 “모기 부리가 철벽을 뚫는 듯한” 제주의 無知한 학인들을 교화하였듯이, 遠惡地 북청에서도 자작나무 굴피집에 살며 독서를 하였고 새로운 벗들과 교류도 하면서 그곳 문사들과 어울려 詩會를 갖기도 하며 *제자들을 양성하였다.각주- 해배 된 후 북청으로 보낸 서간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자. 호를 열거해보면 요선. 유치전. 자기. 질부. 윤생원. 홍보서. 김우민. 박영자 등이다.(유홍준, [완당평전]2, p631) 북청은 제주의 위리안치와는 사뭇 運身할 수 있는 군현안치였기 때문에 고을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가족이나 머슴을 데리고 갈 수 있어 제자 秋琴 姜瑋와 머슴과 함께 일상을 살 수가 있어 외로움도 한결 덜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러운 세속에 동화하지 않은’,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이 살아온’ 直道以行의 결과인지, 북청에서의 <明月梅花>, <道德神僊>, <眞興北狩古竟>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편안함, “곤궁하거나 현달함에 개의하지 않고, 죽고 사는 것을 한 가지로 보아 담박”한 삶에서의 달관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리 저리 정처 없이 떠돌면서도 뭇사람들처럼 더러운 세속에 결코 동화되지 않는 金石氣의 跟脚은 여지없이 꼿꼿하다. 추사 말년의 성향, <茗禪> [板殿], <溪山無盡>, <大烹豆腐>에서의 金石氣의 骨格에 솔직 담박함이 재구조화된 인생관과 예술관은 제주의 碧海長天 限無窮己 바다에서 淨化되어 북청의 遠惡地, 大地에서 昇華되어졌다고 보아진다.
추사는 평소 금석학자, 고고학자, 역사, 지리학자답게 답사를 좋아하여 북청에 유배 와서도 유적지를 찾아가서 유물을 살피고 고증을 하고 민족의식을 발현한 시를 남기기도 한다. 추사가 청나라 학자들과의 심오한 학예 교류로 단지 청조학풍으로 傾倒, 심지어는 사대주의적 분위기에서 탈피하지 못한 지식인이라는 오명을 깬, 추사가 우리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동경했음이 확증되어지는 작품이 북청 유배시기에 다수 있다.(유홍준, [완당평전]2, p637-639). 다음은 尹瓘이 先春嶺에까지 국토를 확장하여 ‘高麗之境’이라고 비석을 세운 公嶮鎭에서 지은 시 <鍊武堂>와 渤海를 세운 大祚榮을 賞讚한 <城東避暑>로 추사가 동경한 대륙적 기상이 함의된 시이다.

<鍊武堂>

*어조라 풍운이라 화각의 동쪽에는
여섯 성의 한 길이 보루로 통하누나
낡은 산 넘치는 물 先春嶺 끼친 자취
당년의 尹侍中을 생각사록 슬프기만([완당전집]3, 詩, p270)

*고대의 陣法

<城東避暑>

大氏의 남녘 서울 붉게 물든 저녁 노을
산천 보니 오히려 웅한 포부 기억되네.
한 지팡이 한만한 지경을 거느리며
버들 물결 솔 파도에 더위를 흩날리네.([완당전집]3, 詩,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