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2

clara jeon 2018. 8. 27. 20:43

   또한 추사는 북청 유배시기에 황초령에 있는 진흥왕순수비를 영구하게 보존토록 조치를 취하여 순수비의 서체를 후학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역사. 금석학자로서 공헌을 하였다. 추사는 이십여 년 전인 1832년 47세 즈음, 권돈인이 함경감사로 부임해갔을 때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보게 하여 마침내 비석조각을 발견하여 그 탁본을 받아 <진흥2비고>를 저술은 하였으나 불행히도 당시 이 비를 추사의 뜻대로 보존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추사가 북청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을 때, 후배이자 제자인 침계 윤정현이 마침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와 이를 다시 추진, 윤정현은 추사의 극성에 가까운 열정과 집요함을 받들어 시행하여 순수비를 원위치까지는 올리지는 못하고 황초령 아래 中嶺鎭까지 세우고 그곳에 비각을 지어 보호하도록 조치, 일단의 완결을 보여 추사의 숙원을 풀어주고는 추사에게 이 비각에 현판 글씨를 청하니, 추사는 흔쾌히 예서체의 현판 <眞興北狩古竟>을 써주었다. (완당평전 2, p621-624 ) <眞興北狩古竟>은 추사가 자신의 묵은 숙원이 풀어진 마음, 애정과 흥을 그대로 표출한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웃고 있는 듯한 純眞無垢한 작품이다.(그림탑재) 그러나 천연스러운 다양한 예서체의 변형 속에서도 추사체만의 ‘怪’와 금석기가 오롯하여 신라 화랑의 굳센 骨氣가 흐트러짐 없이 표출되어 있어, 추사가 하나의 의미있는 서체를 창출하기 위해서 역사, 지리, 고고학을 탐구하며 고뇌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추사의 숙원을 풀어준 침계 윤정현과의 <梣溪> 현판의 일화에서도 그 고뇌의 흔적을 감명스럽게 읽을 수 있다. 추사와 윤정현과는 *최완수의 추정에 의하면 윤정현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이유가 추사의 귀양살이를 돌봐 주기 위한 조정의 정치적 배려라고 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각주-최완수 선생은 윤정현의 함경감사 부임을 추사의 귀양살이를 돌봐주기 위한 조정의 정치적 배려였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추사가 방송되자 4개월 뒤 윤정현도 함경감사에서 해임되었다고 보았다.[완당평전]2, p619-620) 윤정현은 시.서에 뛰어났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출사는 늦어 51세에 과거에 합격, 그러나 파격적으로 곧 규장각 대교, 성균관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과거급제 7년 만에 병조판서가 된 추사의 후배이자 제자였다. 워낙 文氣있는 文雅한 이들을 선호하는 추사는 자신이 탐구하는 학문인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침계를 몹씨 아꼈던 모양이다. 윤정현이 판서의 벼슬에 오르자 추사는 축하의 선물로 <道德神僊>이라는 극찬의 칭송 횡액 글씨를 써주었다. 그리고 <침계> 현판 글씨를 써주었는데 이 횡액의 발제가 참으로 범인으로서는 추사에게 犯接하지 못할 경지가 드러난다.

梣溪,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 예서로 쓰고자 하였으나 漢나라 비문에서 첫째 글자를 찾을 수 없어서 감히 함부로 쓰지 못하고 마음 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이미 30년이 되었다. 요사이 자못 北朝 금석문을 많이 읽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의 合體로 씌어 있다. 수나라. 당나라 이후의 陳思王이나 孟法師와 같은 비석들은 그것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그런 원리로 써내었으니 이제야 평소에 품었던 뜻을 쾌히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선배, 스승의 정성에 윤정현은 추사가 북청에 유배를 떠나자 의도적으로 함경도 관찰사로 함흥에 왔음직도, 최완수의 추정이 가능하다. ‘梣’이라는 글자의 예서체의 근거를 찾을 수 없어 함부로 쓰지 못하고 있다가 30년이나 지나 최근에 우연히 북조 금석문을 읽다가 해서와 예서의 합체로 씌어있는 것을 발견해 그를 창안해 윤정현의 부탁을 상쾌히 갚을 수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에 의한 靈感inspiration 없이는 한 획도 움직이지 않는 法古創新. 格物致知. 實事求是, 추사 예술의 창조 근원, 이를 강관식은 “추사는 보다 근원적인 역사적 결혈 속에 담겨 있는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를 더욱 근원적인 차원까지 본질화시킴으로써 그 구체적인 역사적 한계를 벗어난 뒤, 이러한 근원적인 요소와 자신이 개성적인 성령을 융합시켜 자신의 실존적인 맥락에서 이를 매우 독창적으로 창조, 즉 오랜 역사적 진실과 자아의 실존적 진실을 합일하여, 과거와 현재의 분열을 넘어서서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통합된 새로운 시간 속에서 오히려 더욱 새롭고도 생생한 실존적 현재를 창출하였다.”(강관식, [추사와 그의 시대], <추사 그림의 법고창신의 묘경>, p.264-266)라 풀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