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4

clara jeon 2018. 8. 27. 20:54

   제주 귀양살이 시절에도 동생들이 추사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면 의아하다고 策을 하여 명희, 상희를 난감하게 하였을 터인데, 북청에서도 추사의 박학독행의 학구열은 여전하여 현재도 그 먼 외지 제주나 북청에 책 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 즉, 이를 감당하는 이들의 속 끓음이 어지간하였을 것이다. 하기야 당대의 석학인 맏형의 수발에 긍지를 가졌을, 閔奎鎬가 <완당김공소전>에 “공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 性孝友愛”기록으로 보아 두 아우들은 이런 노고를 감내하였을 것이다.
    추사는 이렇듯 필요한 책이면 천리 먼 집, 藏書들에서 찾아내 읽어 학구열을 다지고, 벗들과 詩文을 담론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유적지 답사, 금석 연구, 고증하며, 그로 인한 靈感으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비교적 제주의 위리안치 귀양살이보다는 자유로운 편안함으로 일상을 秋琴 姜瑋와 더불어 지내고 있던 중, 1852년, 철종 3년, 8월 13일, 경상도 순흥에서 유배 중인 평생지기 권돈인과 동시에 함께 해배의 명을 받는다. 이 날의 기사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기재되어있지 않다. [일성록]에 의하면 철종이 권돈인과 김정희를 석방하라는 전교를 내리자, 안동김문의 일파였을 승정원에서 즉시 반대하는 啓를 올렸으나 철종은 의외로 “승정원은 삼사와 다르다. 즉시 반포하라”고 명하자, 이제는 삼사와 홍문관까지도 치자와 상소를 올려 석방의 부당함을 간하여 傳啓 철회를 보름동안이나 요구하였다.([완당평전]2. p642) 그러나, 철종은 유배를 보낼 때와는 다르게 안동김문 근신 일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철종 3년 9월 3일자 기사에는 이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재하고 있다.

철종실록 4권, 철종 3년 9월 3일 경술 2번째기사 1852년 청 함풍(咸豊) 2년

삼사와 양사에서 권돈인과 김정희의 일을 정계하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했던 권돈인(權敦仁)의 일을 정계(停啓)하고, 양사(兩司)에서 합계했던 김정희(金正喜)의 일을 정계하였다.
○三司合啓, 權敦仁事停啓, 兩司合啓, 金正喜事停啓。

해배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 준 이는 추사의 서간문에 의하면 “尊書를 專人으로 보내면서 恩敎를 받들어 써보내셨는바, 이것이 6일 만에 당도하여 집의 서신보다 먼저 왔는지라, 眷注에 대하여 너무도 감격한 나머지 놀라서 넘어질 지경입니다.”([완당전집] 卷二, 與石坡興宣大院君)로 보아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이다. 석파는 자신에게 蘭畵 한 권을 그려주며, 이 일, 蘭치는 일이 “비록 하나의 하찮은 技藝지만, 그 전심하여 공부하는 것은 聖門의 格物致知의 학문이며, 군자는 일거수일투족이 어느 것 하나 道 아닌 것이 없다는, 이렇게 하지 못하면 곧 俗師의 魔界에 불과하다”는 가르침과 “가슴속에 5000권의 서책을 담고 팔목 아래 金剛杵를 갖추기를” 바라는 30년 손위인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보답으로 북청까지 使者까지 보내며 기쁜 소식을 알렸을 것으로 사료된다.
    추사가 북청으로의 유배의 명을 받은 1851년, 철종 2년, 7월 22일으로 부터, 죄인의 이름과 죄명을 수록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사간원과 사헌부의 傳啓에서 권돈인과 김정희의 이름을 빼버려 훗날에 다시 재론되지 않도록 停啓되는 1852년 철종 3년 9월 3일까지, 1년 여 간의 귀양살이하고 난후 돌아와 다시 삶을 일으켜 세운 곳은 瓜地草堂이다. 

   추사가 과천에 자리한 과지초당에 도착한 날은 1852년 10월 9일로 이는 과천에 도착한 추사가 북청으로 돌아가는 아전 편에 북청의 어느 벗에게 보낸 서간문, “먼 포구에서 이별한 뒤...... 남쪽으로 걷고 또 걸어..... 이달(10월) 초아흐렛날 비로소 과천집에 당도하였습니다.”로 알 수 있다.(유홍준, [완당평전]2, p.649) 오이 밭에 있는 풀집이라는 瓜地草堂 別墅는 “果寓”라 하였는데, 이 별서에 대한 기록은 김노경이 생전에 청나라 학자인 鄧傳密에게 보낸 *서간문에 언급되어 있다.(각주: 저는 노쇠한 몸에 병이 찾아들어 의지가 갈수록 약해지는데 직무는 여전히 번잡해서 날마다 문서에 파묻혀 있습니다. 요사이 서울 가까운 곳에 집터를 구해서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자못 정원의 풍모를 갖췄습니다. 연못을 바라보는 위치에 몇 칸을 지어서 ‘과지초당’이라고 이름 했습니다. 봄이나 가을 휴가가 날 때 적당한 날을 가려 찾아가 지내면 작은 아취를 느낄 만해서 자못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합니다.후지즈카 치카시, [秋史 金正喜 硏究],p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