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6

clara jeon 2018. 8. 27. 21:08

    추사는 허화로움의 가치를 山陰雪棹의 고사, 밤눈이 개인 달밤에 王獻之가 달빛을 타고 벗 戴逵를 만나러 갔다가 대규의 집이 바라보이는 강가에 다다라서는 굳이 대규를 대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냥 돌아와버린,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왔을 뿐, 어찌 꼭 만나야 그 흥이 있겠는가”의 氣와 興이 넉넉하고 고르게 가라앉은 비움(虛), 천연스러움의 경지로서 늘 동경하였고, 이 허화의 경지에 들어선 과천시절, 老果, 果坡, 果兄, 果山, 靑冠山人, 果七十, 七十一果 등의 낙관을 사용한, 大巧와 平凡을 超脫한, 拙의 대교 경지 허화스러움의 작품들은, ‘怪’의 기교를 감추고 拙한 ‘大巧若拙’, ‘不計工拙’, ‘守拙山房’의 원숙한 노경의 과천시절 명작들이다.([완당평전]2, p712-714)
    추사는 ‘工拙’ 경계를 넘어 不二조차에도 "知天命" “耳順”하여 과천시절에는 七旬의 “從心所欲不踰矩” 성향의 명작들을 쏟아내었다. <茗禪>, <史野>, <溪山無盡>, <百蘗>, <大烹豆腐>, <浮嵐煖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 명작들 하나, 하나에서 곱다란 꽃이, 향이 품어져 있기도 하고, 대나무의 올곧음이 땅 속에 뿌리내려있기도 하고, 때로는 지상에서 흔들거리는 척, 大笑하기하고, 소박하고 단아한 도라지꽃 微笑처럼 순박하기도 한, 밀어붙일 때는 확실하게 밀어 붙이고, 풀어놓을 때는 가을 갠 날에 햇살처럼 펼쳐지는,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는, 氣와 興이 넉넉하고 고르게 가라앉은 비움(虛), 천연스러움의 경지, 虛和스러움의 경지, 七旬의 “從心所欲不踰矩”.
    그리고 “七十一과 病中作” 죽기 3일 전에 최후 명작, 絶筆 <板殿>
    과천에서의 병중인 칠순 시절에도 추사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학문에 전념, 그가 아는 바를 청관산옥을 찾아드는 제자들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르쳤다. 그리고 여전히 古書畵, 古物을 금강안, 혹리수 눈썰미로 세밀하게 분석, 논증하여 眞假를 규명하는 데에도 여념이 없었다. 추사가 書畵뿐만 아니라 모든 고미술품 감정에 일가를 이루고 있다는 일화, 어떤 이가 작은 칼을 얻어 드렸더니 선생은 돈 칠천으로 갚고는 “옛 切玉刀”라 하였는데 후에 문인 김석준에게 부탁하여 연경에서 팔아 수 만권의 책을 구매하였다([추사연구] 제2호,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김승렬 저, 이선경 역 p.277)하고, 더욱이 추사가 당대에 세계 미술사를 섭렵하였음을 반증하는 ‘東卿秋史同審定印’, 東卿은 옹방강의 제자 섭지선의 자로서 燕京의 東卿 섭지선과 한양의 秋史 김정희가 국경을 넘나드는 古藝術品들을 함께 감정한 정품, 진품임을 인정한다는 감상인이므로, 추사는 국내와 중국,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금강안, 혹리수이었다.([완당평전]2, p701-702)
    과천시절에도 제주, 북청 유배시절과 다름없이 추사의 문하에는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 우선 이상적, 우봉 조희룡, 이당 조면호, 침계 윤정현, 어당 이상수, 동안 심희순, 소당 김석준, 소치 허련, 고람 전기, 역매 오경석, 제주, 북청유배시절에 함께 한 제자 추금 강위 심지어 북청 유배시절의 제자인 요선 유치전 등, 외에도 山崇海深의 경지를 존경하며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끊임없이 배움을 청하였다. 이들 중에 역매 오경석은 금강안, 혹리수의 추사의 감식안을 전수 받아, 그의 아들 위창 오세창은 훗날 간송 전형필의 고서화를 감정, 오늘날 간송컬렉션이 조명 받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특히 추금 강위와 역매 오경석은 훗날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위창 오세창은 33인 중의 한 분으로 활약하였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추사의 양반 제자 신관호 등과 중인인 역관 제자들 유장환, 민태호, 남병길 등, 구한말 개항과 개화기 때 진보적 지식인 즉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한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다.([완당평전]1, p296) 이로 보아 추사가 청나라의 선진적인 학예를 탐구함이 단지 학문의 연구에만 한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學藝의 先進化를 제자들의 의식의 선진화에도 직간접으로 濕潤性的인, 개화의 선지자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Ⅳ. 추사의 평생배움과 현대교육의 합일, 3)受容的 인간관계(身分超越)에서 다시 深度 있게 考察하기로 한다.
    추사는 1856년, 병진년 10월 10일 卒하였다. 다시 [조선왕조실록]의 추사의 졸기를 언급하며 행간과 행간 사이에 함의된 추사의 삶을 되새김하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