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강상시절과 북청유배> - 15

clara jeon 2018. 8. 27. 21:00

과지초당은 1824년, 추사는 39세로 규장각 대교로 재직하고 있었고, 김노경은 59세로 대사헌. 이조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쳐 한성판윤 재직 시, 추사가가 번창하고 있을 당시, 관악산과 청계산 사이에 있는 야산과 밭을 구입하여 조성한 별서로, 園林과 연못을 갖춘 자못 아름다운 작은 집으로 편액을 과지초당. 春秋休木이라 하고, 추사 부자는 이곳을 찾아 간혹 遊樂하였고, 김노경이 72세로 세상을 떠난 1837년에는 선친의 묘소를 과지초당 뒷산에 마련, 추사는 廬幕에서 3년 喪을 치뤘다.([완당평전]2, p649-650) 
   추사는 別墅였던, 그러나 30여 년 후,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삶을 부칠 수 있는 유일한 “果寓”에서 淸虛한 마음, 觀照의 시선으로 그린 담박한 시가 [완당전집]에 2수 남아있다.

<果寓村舍>

한녀라 고을 서쪽 병을 끼고 사노라니
밤을 새는 시내 소리 몹시도 청허하네
다리 앞 한길가의 여윈 소랑 조랑말은
滄茫한 그림 재료 저 들의 차지로군


양쪽 산 파릇파릇 갠 날 끼고 트였는데
마을 기운 무더위라 모두가 흐리멍덩
우후의 부끄럼을 평생에 모르는 듯
성안에 가 날마다 땔감 팔고 돌아오네([阮堂全集]卷九, 詩, p.297)

‘양쪽 산’, 청계산과 관악산에 위치해 추사는 이 시기에 작품에는 ‘靑冠山屋’이라 낙관도 한 과지초당에서, 실개천 흐르는 소리를 베개 삼아 잠을 설친 추사가 마음에 흐르는 물소리를 새벽 햇살로 다듬고 맞이한 오늘과 지난날의 느낌은 제주의 바다처럼 넓고 북청의 하늘처럼 멀어서 아득한, ‘滄茫’ 아닐까. 그리고 새벽녘이면 땔감을 소 등에 싣고 날마다 성 안에 들어가 팔고 해질녘에 청계산과 관악산을 배경삼은, 실개천 흐르는 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는 촌부의 모습, 한 폭의 그림을 구름 마음에 그렸을, 추사는 남쪽 궁벽한 바다에서 10년, 북쪽 머나먼 변방에서 2년의 유배의 삶과 대비, 촌부의 부끄럼 없는 단순한 일상이 부러움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이러한 觀照의 시각이 不二경계조차도 넘어선 평범을, 평생지기 권돈인에게 <退村> 현판을 써 주었을 때에 “공졸을 또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며, “이제서야 속서는 면했음을 알겠습니다.”고, 비로소 자신의 스스로의 허물을 벗고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의 ‘虛和’ 경지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