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에서의 家庭敎育- 2

clara jeon 2018. 9. 17. 16:51

    추사가 살던 시대는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으로 추사 역시 유학을 기본 골격으로 다져진 名門世家에서 양육되었다. 그가 비록 명문의 權門勢族이었으나 평생을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배움의 끈으로 일상을 쓰임있는 그릇으로 실용의 삶을 산 연유는 앞의 서술, 율곡의 “일상에서의 쓰임새”의 함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추사의 당대와 현대 가정의 의미에는 相異한 점이 있을 것이나, 추사가 살던 그 시대나 작금의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이루어지는 가족 구성원들의 養育의 자리매김은 同質로 동시대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靑壯年期의 추사는 스승들과 知己之友들과 자신의 학문을 談論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열정적이었다. 추사의 청장년 시절인 19세기 조선 초중기 문인들은 尺牘을 단순히 우정 표현의 매체나 풍류의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 인생관을 본받는 敎道的인 의미로 교류하였고, 더 나아가 홍대용으로 부터 시작되는 청나라 학자들과의 書牘은 양국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벗어나 학술과 문화의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 수준을 제고 시켜보자는, 愛國的인 목적으로 점차 의식이 변화되고 있음을 담고 있다.([18~19世紀 朝.淸文人 交流尺牘 硏究],천금매, 延世大學校 大學院, 2011, p.2-5) 추사의 서간문 역시 단순한 안부 인사 정도가 아니라 金石學. 考證學. 經學. 敎育學. 書體論. 畵論 등 학예 토론장으로, 추사 학예를 연구하는 후학들은, 연구 자료를 그의 서간문에서 근거를 찾을 정도로 추사의 학예 硏鑽은 사제지간으로서, 평생지기 朋友들로서 끊임없는 서독 교류로서 이루어진 성취이다. 추사는 자신이 탐구한 학예를 국내의 知己之友에게 심지어 국경을 건너 淸의 燕京 학자들에게 서간문으로 토로하고 발표하여 배움의 길의 폭과 깊이를, 생의 말년, 죽음의 직전에도 멈춤이 없이 열정적으로 山嵩深海, 전력하였다. 혹자는 <서독>에 수록된 이러한 추사의 山嵩深海 학예 경지를 옹방강. 완원 등 연경학자들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것이라고 단면만으로 斷言하나, 실은 추사 학예의 본원은 家庭이며 그리고 師友들과의 소통의 담론에 의해서 이다. 이를 정인보는

공은 어려서 특이한 자품을 타고난 데다 부친 酉堂公이 넓은 식견으로 實事求是의 학문을 하므로 말미암아 가정에서 이미 부친의 학문을 받았던 것이다.....

공이 弱冠 시절에 사신 가는 부친을 따라 燕京에 가서 옹방강. 완원과 교유하고 그 후로는 그들과 서신 왕래를 한 것이 매우 번다하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그 사실만 보고서 마침내 그의 학문이 여기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일찍부터 家庭과 師友들로 부터 전해받은 것이요, 그들을 힘입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완당전집], 卷首,<완당선생전집서>, p4)

    이 글에서는 추사 삶의 버팀목인 늘 공부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실사구시의 선각자로 정인보가 언급한, 부친 김노경을 추사의 가정교육의 양육 중심인물로, 그리고 추사의 청장년 시기의 인격형성에 교육적인 영향을 준 師友로는 스승 楚亭 朴齊家. 覃溪 翁方綱, 雲臺 阮元 學友로는 청나라 학자 月汀 李璋煜. 東卿 葉志詵을, 국내 지기지우로 彛齋 權敦仁, 紫霞 申緯, 草衣禪師, 藕船 李尙迪의 서간문을 선별하여 추사와의 평생배움의 同行 路程을 논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