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과 현대교육의 합일: 추사의 평생배움의 源泉: 叡智逸脫 (1)

clara jeon 2020. 3. 17. 17:17

1. 추사의 평생배움의 源泉

1)叡智逸脫

    위대한 그림은 예술적, 철학적, 종교적, 심리학적, 사회적, 정치적 충동과 정보의 예외적인 집중과 합주이다. 더 위대한 예술가일수록, 각각의 색상과 선과 제스처가 사유와 감정의 해류이자 강물이 된다. 위대한 그림은 순간들을 응축하고, 양 극단을 화해시키며, 창조행위의 고갈되지 않는 잠재력에 대한 신뢰를 계속 견지한다. 그 결과 위대한 그림은 필연적으로 가능성과 권력의 상징이 된다.
...회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이런 유형의 집중과 일관성이 제공하는 경험은 단지 심원하고 시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황홀하고 심지어 신비적이기까지 하다. 물질 속에 정신이 육화되게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물질 속에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도달할 수 도 있다.
회화는 치유의 약속을 가리키고 있다(Michael Brenson, "Healing in Time", in Mary Jane Jacob, ed., Culture in Action: A Public Art Program of Sculpture Chicago(Seattle: Bay Press, 1955), 28-29.(아서 단토,[예술의 종말 이후], p330, 이성훈. 김광우역, 미술문화, 서울, 재인용).

아서 단토는 위의 글을 인용하여 [예술의 종말 이후], 이미 진입한 다원주의의 시대에서의 예술의 역할을 희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파편화된 인간의 정신문화란 예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즉 학문이 예술이 인간의 의지에 씨를 뿌리고 꽃을 피우고 진선미의 열매를 맺는 치유적인, 정화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여, 현대인들은 인간 삶의 본디 모습을 상실, 단토는 죽음과 삶의 문화의 양극단의 폐허의 현장에서, 고갈되지 않는 잠재력에서 우러나오는 창조행위로 죽음의 문화와 삶의 문화의 암투를 종말하고 인간의 존엄적인 신뢰성을 회복 견지, 양극을 치유하고 화해하는 예술의 실효성의 소생을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가의 역할로 상정한 것이다. 황금만능의 물질 세계의 죽음의 문화에서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유일한 생존은 정신의 육화로의 치유로 인간의 참살이를 회복하는 것만이 예술의 핵심임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풀이하자면 단토가 언급하고 있는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의 終末은 삶의 罷場, “끝”의 뜻이 아니다. 즉 다음 세대의 생장을 준비하고 있는 대나무의 매듭을 의미한다. 어느 한 시대도 종말이 아닌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은 늘 종말론과 함께 인류의 삶을 고갈되지 않는 용기있는 창조의 도전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을 시도, 그 모험은 인류를 소생시켜왔다. 죽음으로 치닫는 문화를 소생의 삶의 문화로 轉換시키기 위하여 도전과 모험을 하는 開明한 이들을 우리는 선각자라 한다. 이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의 문화 혁신. 혁명가(cultural revolutionary)들의 삶은 예지(叡智. 銳智. 豫知)逸脫的이었다. 그들은 先覺하여 구시대의 폐습과 폐단에 반발, 도전하여 현실과의 타협, 일신의 안전과는 무관하게 대중의 삶에 善意를 전도, 인도하였으나 그들의 주창과 시도는 下剋上으로 현실에서 蹂躪되거나 소외되거나 심지어는 축출, 제거되었다. 그러나, 그 대나무들의 매듭은 더욱 견실해져 미래의 세계를 늘 푸르게 하늘을 향해 솟아 오르게 하였다. 추사의 直道以行이란, 선각한 학예인의 고단한 노정이었다. 선각하지 않은 직도이행이란 인간 참살이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추사의 유배의 삶, 백척간두의 파란만장의 삶은 단지 정치적인 부침이 처단됨으로서의 세한의 나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대를 豫知한 예지일탈한 지혜로운 선각자로서 당연히 걸어갈 수 밖에 없는 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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