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Ⅳ. 추사의 평생배움과 현대교육의 합일

clara jeon 2020. 3. 17. 17:10

Ⅳ. 추사의 평생배움과 현대교육의 합일

    추사는 일생은 배움의 진실성을 見性하기 위한 路程이었다. 그가 주창한 <실사구시설>. <인재설>. <적천리설>과 그 외에 후학인들에게 전하고 싶을, 배움의 여정에서 함의 되어있을 “學”에 대한 拈華示衆은 관념적인 감상의 발로나 토로가 아닌 實在하는 實存의 실사구시적인 실현이었다. 그는 직도이행의 역동성으로 주변인 실생활을 진선미로 승화하여 사회와의 연결, 통합하는 예술 창조에 魂神을 다하였으며,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신분을 타파, 초월한 자율적인 가르침으로 후학을 양성하였다.
    어떤 예술가도 개인적 감수성에만 의지해서 창작하는 것은 아니고, 이어받은 전통양식과 시대적 문제의식에 의해 창작에 임한다(조요한, [예술철학], p337). 추사는 조선 후기 당대 사회 변화 양상과 그로 인하여 앞으로 당면할 구한말의 문화적인 위기를 통찰하였다. 시대적 문제를 자신이 양성하는 제자들과 함께 전통을 기반으로 하는 법고창신의 교육과 창조로 그 해답을 찾으려 하였다. 조선후기 구한말 추사와 그의 제자들의 개화적인 활동상을 분석하면 그들은 단지 학예적으로 시서화만을 향유하지만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추사와 그의 제자들은 구한말의 변화양상에서 비합리적인 모순으로 인간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주는 실제적인 사건들을, 그들이 창조하는 학문과 예술의 실사구시적인 실존의 행동성으로 인간 의지와 자유를 회복, 진정한 인간의 삶으로 회귀시키고자 하였다. 바로 교육의 진정성이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의 지상에서의 진실성은 사람다운 삶을 구현하고자 함이다. 그것이 아무리 정신적인 활동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비로운 비합리성을 동반하지만 그러나 순수한 정화. 승화의 행적은 분명 실재하는 실존으로서의 삶의 생동성을 주는 실용성과 별개의 산출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추사 창작품들의 영구적인 생명성은 과거의 언어로 현재를 소생, 작금의 현대의 학예인에게 생명성을 선사하는 아우라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는 그동안 교육과 예술의 진실성의 부재로 병들어가는, 인간의 존엄한 정신성. 생명성을 경시한 댓가, 병든 군상들을 茫然自失 바라보며 22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삶의 본디 모습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에 의문을 던질 수 없는 파편화한 인간들이자, 수단이 목적으로 뒤집힌 세상에서 부속품이 된 교육양이다(한준상,[生의 痂],p267,학지사,2009,서울). 종말로 치닫는 것과 보이는 현상들이 뉴스조차도 새로움의 발돋움이 없이 오히려 시청자들을 병들게 하고 있어, 현대인들은 有口無言, 미래로의 삶에 씨앗을 뿌릴 수 없어 절망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건 종말적이었고, 터널의 어둠을 벗어나게 한 선각자들의 열정은 학문과 예술로서 적천리의 길을 제시하여, 인간들의 일상을 빛으로 인도하였다. 추사는 말년 과천시절 자작시에 “세상살이 삼십 년에 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다”, 그리고 이 구절은 학문의 길을 걷는 학인에게 勸學의 의미로 별도 부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움의 목적은 행복한 생활(eudaimonia)을 위함이다”이라 하였고, 그가 언급한 가장 바람직한 행복한 삶이란, 신체적 쾌락과는 거리가 먼 선과 지혜를 추구하는 삶으로, 참된 행복은 배움의 길에서의 도덕적인 덕과 지성적인 덕을 매일 실천하는데서 성취할 수 있다(한준상,[生의 痂],p267,학지사,2009,서울).
    추사는 행복한 삶을 얻어내고자 배움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참된 배움의 길에서 진선미 三昧의 경지로 몰입, 無我의 평심정기 박학독행, 그리고 현재의 삶에서의 실사구시적인 실천으로 행복하여 짐을 염화시중하였다. 이 장에서는 작금의 비도덕. 비윤리적인 인간들의 종말적인 비교육적, 비예술적 작태로 인한 소생 불가능할 것 같이 비추어지는 현실을 추사의 평생배움의 근원, 古語的인 학예 세계를 현대의 언어로 소생, 죽음의 물질문화의 급변의 물살에서도 인간다움으로 선과 지혜를 추구하는, “바로 살기”의 평생배움의 도를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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