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小癡 許鍊의 가르침에서의 평생 동행의 모습(8)

clara jeon 2020. 3. 7. 17:35

    김상엽 역시 소치의 예술세계의 용이한 파악을 위해선 추사 김정희으로의 접근이 가장 확증적일 수 밖임을 인정, 시종일관 그의 논지를 소치와 추사의 연관으로 펴고 있다. 이는 소치 삶의 궤적을 [소치실록]과 [완당전집]의 서간문에 드러난 허소치에 대한 추사의 기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료 탓도 있겠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소소한 잡사도 습관적으로 기록을 한 방대한 결과물인 소치의 자전적인 [소치실록]에서의 소치의 행적만큼 그의 화도의 삶이 진솔하게 기술된 물증은 없다고 보아 진다. 한미한 출신의 소치를 무관의 벼슬직을 주어 배알하게 된 배후의 인물 신관호도 영의정 권돈인도, 그리고 詩로서 헌종에게 은총을 입어 자신의 시집을 [恩誦堂集]이라 제한 우선 이상적 모두 추사의 애제자이니, 추사가 “그는 매우 좋은 사람으로 그의 畫法은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기습을 떨어버렸고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여 장안에 畵名이 회자되어있는 소치를 헌종은 당연하게 입궐하게 하였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소치의 “진실로 평민의 최고의 영광이며 고금의 드문” 전무후무는 적천리의 스승과 그를 推仰한 제자의 儀禮의 귀결일 것이다. 일부 논자들의 편협된 시각으로 조선 후기의 학예계에서의 추사 김정희와의 인맥으로 형성된 “완당바람”의 예단에 귀속된 권돈인, 신관호, 이상적, 조희룡, 허련 등 모두를 추사 김정희의 제자라 하여 그들이 나름의 개성이 없는 시종제자들이라 한다면, [예림갑을록]에서 보이듯이 제자들의 개성에 따라 지도를 한 추사의 적천리의 가르침은 의미없는 부침일 것이다. 추사는 그의 제자가 몰개성적으로 빼닮기는 원하지도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 한 예로 추사는 당대의 화인이라 회자되던 조희룡을 書道에 들어선 아들 상우에게 보낸 서간에서, 스승 추사의 글씨인지 우봉의 글씨인지 조차 분별하지 못하게 그리는 조희룡을 상찬할 만도 할 터인데, 추사는 우봉을 문자향 서권기의 神似가 志操하지 못하는 단지 形似만이 분분한 눈만을 眩惑하는 환쟁이로 폄하하였다. 추사는 제자들이 추사라는 스승의 내면을 形似하기를 바라는 지도를 한 것이 아니라, 제자 자신들의 내면 세계를 神韻으로 神似하기를 가르쳤다. 그 卑近함을 권돈인의 [세한도]와 소치의 [세한도]에서 볼 수 있다. 이들 [세한도]는 각자의 성정에 따라 그 운필법도, 표현한 대상도 모두 달라서 그림의 운치가 스승 추사의 [세한도]하고는 판이하다(도판탑재,유홍준[완당평전]2,p403.404).
    [소치실록]에는 1855년 허련은 아들과 함께 과천 과지초당의 추사를 찾아 뵈었다. 이십여 년을 실재, 혹은 정신적으로 동거동락한 71세의 스승 추사는 이 만남을 마지막으로 1856년 타계한다. 이 후 49세의 소치는 진도로 귀향, 운림산방이란 이름지운 소치암에서 작품제작에 몰입하나 그의 방랑벽과 경제적인 궁핍 탓인지 다시 주유를 시작한다. 육칠십대 노년의 식객으로서의 방랑은 그의 학예의 경지를 知音하던 김정희 권돈인 신관호 정학연등이 세상을 떠나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는, 자신의 예술의 경지를 지음하는 이들을 찾는 여정이 아닐까.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俗氣의 현실과 문인화 지향인 文氣의 내면 세계와의 괴리감을 방랑의 여정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이해하는 이들과의 만남으로 해소하지 않았을까. 이를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소치실록]에는 71세에 고종의 친정 선포로 섭정에서 물러난, 그러나 여전히 권세가인 운현궁의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세임에도 조정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민영익과의 만남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허련은 [소치실록]에서 이들과의 만남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는데, 행간에서의 함의에서 이들이 자신의 예술세계 인정에 자긍함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