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小癡 許鍊의 가르침에서의 평생 동행의 모습(7)

clara jeon 2020. 3. 7. 16:41

   추사에 대한 헌종의 마음씀이, 愛慕가 절절히, 그러나 속내 깊게 흥건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헌종의 인품의 河海가 深懷로 눈물짓게 하니 답하는 소치의 傷心은 어떠하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소치의 상심과 눈물이 어렸을 아룀으로 헌종은 추사의 해배를 안동김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았을까. 소치는 헌종이 "그대가 세 번 제주에 들어갈 때"라고 하였듯이 세 번 추사를 찾아 뵈었다. 세 번째 찾아뵙기 이전에도 소치는 자주 문안하지 못하는 悚懼한 마음을 이재로 하여금 부채에 마음을 담아 絶句 2수를 써서 제주에 있는 스승에게 보내자 추사는 이에 和韻하여 이 合壁扇(각주)은 장안에 화제가 되어 회자되었다. 추사가 말년에 까지 학예에 몰입하여 자신의 지고한 예술의 경지를 품어낼 수 있는 정황에는 우선 이상적과 같은 부유한 역관, 중인 제자의 물질적인 바라지도 있어서 가능하였지만, 貧寒한 鄕班임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버리는” 백척간두의 풍랑의 삶을 함께 한 소치와 같은 애제자의 지극정성이 추사의 작품에 아우라를 더욱 빛나게 하였을 것이다.
    1849년, 일개의 평민 화가 신분으로는 왕을 拜謁할 수 없으므로 신관호의 주선으로 고부감시에 합격한 武官, 더욱이 헌종이 하사한 3백금으로 집을 장만한 41세 장년의 소치는 이 한 해 동안 다섯 번이나 헌종을 알현한다. 정월 보름, 22일에 알현하고 하사 받은 화첩에 지두화 산수화를 그려 25일에 진상하였고, 대면한 자리에서 고서화를 품평한 한 것으로 보아 헌종은 소치의 화격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적인 기량도 높이 산 것으로 보인다. 헌종은 소치의 시를 읽어 보고는 [詩法入門]을 하사, 소치가 화가로서 덕목인 인문적이 소양을 갖추라는 당부이기도 하지만, 소치에게서 읽혀지는 명문 사대부의 문인기질과 이를 지향하는 소치의 문기적인 재능을 아낀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치는 정월에 이어 5월 26, 29일 재차 불림을 받고 입궐하여 부채를 두 자루를 받고 산수화를 그려 진상하였으나, 7일 후, 1849년(헌종 15) 6월 6일, 외척 풍양조씨의 농단에 자신의 정치관을 펼치지 못하고 그들의 세도에 염증을 내던 23세의 젊은 나이로 헌종은 승하하였다. 군왕이 손수 주신 붓으로 御硯 먹물로 그림을 그리며 왕과 고화를 품평한 전무후무한, [소치실록]에서도 “진실로 평민의 최고의 영광이며 고금의 드문” 일은 아쉽게도 일단락 된다.
    김상엽은 그의 박사논문 [소치 허련의 생애와 회화 활동 연구]에서 소치의 삶을 추사 김정희와의 만남, 배움, 추사의 죽음으로 경계 지었다. 즉 소치의 삶과 예술은 추사 삶의 행보와 거의 동일시함으로써, 추사의 절대적인 영향을 부침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허련이 단지 맹목으로 추사에게 종속, 侍從되지 않았음을 논지하였다(김상엽, 成均館大學校 大學院,[2002] 국내박사[소치 허련의 생애와 회화활동 연구],p10). 물론 소치는 남종문인화에만 침잠한 스승과는 다르게 전시대의 작가들의 작품, 심지어 추사가 만류한 겸재류와 같은 前代의 화풍도 참신하게 시도하였지만, 이는 추사에 대한 일탈의 화풍의 모색이 아니라 주류의 곁가지로서의 시도였다고 필자는 단정하는데 그 逼眞의 예로 추사 사후의 소치의 그림은 문인화의 맥을 잇고 있으며 그가 경제적인 궁핍으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東家食西家宿 주유의 시기, 소치의 牧丹畵가 회자되어 인기있는 畵品이었으나 그는 多色畵를 지양한 오로지 墨畵로서의 문자향. 서권기 그림을 구사하였다. 소치는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추사의 서법을 이어 받으며, 중국 北宋代의 선비화가인 米芾. 元四大家, 明代의 五派畵家. 淸代의 石濤 등을 연구하였고, 남종문인화의 필법과 정신을 익혀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都美子 <小痴 許鍊의 山水畵>,[考古歷史學志], Vol.13-14 No.- [1998] 동아대학교p47), 추사로 부터 “그의 畫法은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고루한 기습을 떨어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을 것입니다.” 극찬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소치의 행보를 굳이 추사를 시종하였다고는 확정할 필요가 있을까? 의미가 없을 것이다. 허소치가 추사를 시종하였다 하지 않았다를 분간하기 이전에, 오히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종문인화가 한양의 사대부의 취향에 극한되지 않고 지방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공로를 우선해야 한다고 필자는 사료한다. 필자는 또한 오롯한 문인화가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행보로 말미암아 소치가 장승업과 동등한 구한말 화단의 “오백년 역사 속에 소치만이 우뚝하구나.” 梅泉 黃玹의 표현대로 최고봉으로 손꼽히게 된 원인이라고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