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小癡 許鍊의 가르침에서의 평생 동행의 모습(6)

clara jeon 2020. 3. 7. 15:50

    소치를 이처럼 감싸주는 추사의 마음을 읽은 신관호는 소치를 珠履를 신긴듯이 보살핀 모양이다. 신관호는 1846년 정월 전라우수사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치와 함께 상경한다. 소치로서는 든든한 후견인을 모시고 입성하는 세 번째 한양 길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 또 한 분의 후견인 영의정 권돈인의 安峴洞집 別館에 머무는 중, 이재를 통하여 헌종이 扁帖에 그림을 그리라는 명을 듣고 그린 소치의 그림에 이재는 [小癡墨綠]이라 제하여 헌종에게 올린다. 이 일은 훗날 1849년 헌종은 소치를 궁내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고, 소치의 화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인정한 헌종은 소치를 近位에 두기 위하여 武에는 전혀 門外漢인 소치를 정당하지 않은 무리수로 고부감시로 입격시켜 허름없이 입궐하게 하였다. 더구나 소치의 궁한 처지를 헤아려 3백금을 하사, 소치는 東山泉에 초가를 마련 한양에서의 東家宿西家食의 주유를 접고 정착할 수 있었다. 헌종의 이러한 배려에는 허련의 서화에 특별한 관심도 주요하였지만 허련의 스승 추사에 대한 헌종의 극진한 禮遇와 사랑이 배경이 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글이 [소치실록]에

기유년(1849) 정월 15일, 나는 비로소 入侍 하였습니다. 이날 아침밥을 먹은 뒤 武監 한 명이 大內로부터 나와 구두로 상감의 뜻을 전했는데...... 박진도가 수문장으로 근무하다가 신 대장의 지시를 받아 宣人門을 통하여 들어가라고 일러주었소...... 花草廠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서니 바로 임금께서 평상시 거처하시는 곳으로, 좌우 현판 글씨는 완당 선생의 것이 많더군요([소치실록],유홍준[완당평전]2,재인용,p506).

   헌종은 추사가 제주에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추사의 글씨를 요구할 정도로 추사의 글씨를 평상시 거처하시는 곳에 좌우 현판 글씨로 소장할 정도로 애호하고 소장하였다. 이에 대한 언급은 제주의 풍토병 등으로 병추기가 된 추사가 몸이 아파 제대로 쓸 수 없음을 아우 상희에게 “근래에는 안질이 더욱 심해져 도저히 붓대를 잡고 글씨를 쓸 수도 없었으나 王靈이 이르러 할 수 없이 15-16일간 공력을 들여 겨우 편액 셋과 卷軸 셋을 써놓았을 뿐이네([완당전집]제2권,書牘, 막내아우 상희에게 제7신)." 하소연하는 편지글이 있다. 헌종은 외척인 안동김문, 풍양 조씨들의 세도정치 속에서 右文으로 왕권강화를 위하여 抄啓文臣制를 도입, 문신을 우대하였고 특히 권돈인. 신관호와 같은 文士를 師友로 近臣으로 두었다. 평상시에도 격조있는 산수화를 그린 사대부의 문인화를 지향한  헌종이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있는 글씨를 애장함에는, 추사의 글씨를 각한 현판을 자신이 거처하는 곳에 걸어두고 추사를 哀慕하고자 하는 정감과 그의 문인취향 성정에 기인하겠으나, 외척에 의해 왕권의 기량을 펼치지 못하는 자신과 안동김문의 알력으로 정계에서 축출당한 추사를, 궁궐의 정치적인 위리안치의 국왕인 자신의 처지와 同病相憐으로, 위로받고 또한 귀감의 師友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을까. 헌종의 추사에 대한 隱한 애정과 애잔한 그리움을 참으로 차근차근 드러냄이 소치와의 대면에서 드러난다. 헌종은 추사의 근황을

“그대가 세 번 제주에 들어갈 때 바다의 파도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
“하늘과 맞닿은 큰 바다를 거룻배로 왕래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배의 꼬리에 빈 바가지를 매어단 것은 무엇인가?”
“아마 전복 따는 해녀의 목에 걸어놓은 바가지일 것입니다.”
“김완당의 귀양살이는 어떠한가?”
“그것은 소신이 목격했으니 자세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안에 벽에는 도배도 하지 않은 방에서 北窓을 향해 꿇어앉아 고무래 丁자 모양으로 坐杖에 몸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밤낮 마음 놓고 편히 자지도 못하여 밤에도 늘 등잔불을 그지 않습니다. 숨이 경각에 달려 얼마 보전하지 못할 것같이 생각됐습니다.”
“먹는 것은 어떠한가?”
“생선 등속이 없지 아니하나 비린내가 위를 상하게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혹 멀리 본가에서 반찬을 보내옵니다마는 모두가 너무 짜서 오래 두고 비위를 맞출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하며 날을 보내는가?”
“마을 아이들 서넛이 와서 배우므로 글씨도 가르쳐줍니다. 만일 이런 것도 없으면 너무 적막하여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소치실록], 유홍준, [완당평전]2, 506-507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