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小癡 許鍊의 가르침에서의 평생 동행의 모습(3)

clara jeon 2020. 3. 6. 17:27


공은 당시 부친 喪中이셨습니다. 廬幕의 북쪽 문으로부터 상제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바로 추사공의 仲氏 (山泉 김명희)공 江東 현감이었습니다. 처음 보는데도 관대한 대접이었습니다. 조금 있다 추사공의 季氏(琴糜 김상희)공 敎官이 들어왔는데, 역시 옛날에 이미 사귄 사람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내가 바깥사랑으로 물러나오니, 추사공의 아드님 須山 商佑씨도 기쁘게 대해주었습니다. 나는 계속하여 바깥사랑에서 거처했습니다.([소치실록], 유홍준[완당평전]1,p304,재인용)

추사의 형제山泉과 琴糜, 아들 商佑는 늦깍이 32세로 추사의 문하생으로 입문한 허련에게 恭待하였고, 이들이 베푼 평안함으로 허련은 월성위궁에 머무는 동안 추사의 제자들 閭巷文人 書畵家들과 동문수학하며 文氣 학예의 폭과 깊이를 다듬질하게 된다.
추사는 서른 두살의 늦깍이로 화가로 입문, 畵道의 門經에 들어선 허련에게 화가 소치 허유로서 평생을 지고 가야할 학예인으로서의 畵道를 일갈한다. 이때 추사가 혀련에게 주지한 화도는 예술인 허련에게 지침이 되어 훗날 삶이 곤궁하여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지경이 되었을 때에도 문인화 本道의 명맥을 心志하게 하였다.

畵道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네. 자네는 이마 畵格을 터득했다고 생각하는가? 자네가 처음 배운 것이 공재 화첩인 걸로 아네. 우리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면 마땅히 공재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지. 그러나 그는 神韻의 경지는 부족하다네. 謙齋 鄭敾, 玄齋 沈師正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그들의 화첩에 전하는 것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지 않도록 하게. 자네는 화가의 三昧境에 들어가는 천리 길에 겨우 세 걸음 옮겨놓은 것과 같네.([소치실록], 유홍준[완당평전]1,p304,재인용)

추사가 당대의 三齋,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의 名望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 이처럼 폄하함은 그림 배우기에 첫 발을 디딘 文氣있는 허련이 한갖 形似 묘사에만 치중하여 俗氣의 畵家로의 轉落을 염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추사의 금강안 역시 허련이 비록 몰락한 향반이지만 사대부의 골수임을 分揀하였을 것이고, 허련이 가야 할 畵道의 길이 이들 삼재와 동류가 아님을 간파하였을 것이다. 추사는 허련 그림을 神韻 경지 화격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청나라 화가가 원말 사대가의 그림을 방작한 화첩을 주면서 폭마다 열 번씩 본떠 그려보라고 했고, 허련은 완당의 가르침대로 날마다 추사에게 그림을 그려 바쳤으며, 추사는 그림이 잘된 것이 있으면 그림에 안목 있는 손님과 제자들에게 한 폭씩 나누어주면서 허련을 칭찬해 허련의 이름이 곧 서울 장안에 퍼지게 하였다.(유홍준[완당평전]1,p304) 왕가의 內戚인 권문세가 월성위궁에서 당대 예원의 시서화 삼절이며 석학인 추사 김정희 문하의 제자가 된 허련은 동문수학 문예인들 중 32세의 나이로 늦은 입문이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주지하며 그동안의 形似 위주의 묘사에서 탈피, 타고난 재능과 매일 그림을 그려 스승에게 보이는 切磋琢磨의 노력으로 日就月將, 寫意的인 神韻이 습윤되어 있는 남종문인화풍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추사의 총애를 받는 애제자로 입지한다. 추사는 허련이 畵道의 덕목으로 겸손하게 스승의 주문대로 성실하게 연마하여 허련의 그림들에 文字香 書卷氣의 畵格이 표출되자 원말 사대가 중 명성있는 문인화가 황공망의 호, 大痴를 借用하여 小痴라는 호를 내려 주어 문인화의 本道 門經에 입문하였음을 인증하였다. 궁벽한 섬에서 태어난 일개 鄕班 畵家 허련을 “오백년 역사 속에 소치만이 우뚝”한 인재로 발굴한 추사의 안목과 그리고 허련의 개성과 기질에 맞갖은 교육을 시킨 적천리적인 스승의 역할은, 허련의 畵道 평생 배움 길에 디딤돌이자 바라지창이었다. 늦깍이로 입문하여 동문수학하는 한양의 權門勢家, 巨富인 중인들, 나이 어린 여항문인 틈 사이에서의 劣等感을 格物致知로 극복하였을 소치는 급기야 추사에게 그 유명한 칭찬, 추사 문하의 제자 중에 그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압록강 동쪽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라는 최고의 상찬을 받는다. “압록강 동쪽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의 最善의 추사의 칭찬에는 소치의 그림에서의 형사, 신사적인 묘사력 뿐만 아니라 예인으로서의 자존감의 직립 心志가 내재함에, 추사의 直道以行의 共鳴의 인정이 있었다고 필자는 確定한다. 이는 추사 死後, 소치의 周遊 行脚에서 문자향. 서권기의 문인화가로서의 一邊倒에서 드러난다. 추사는 소치에게 단지 한갓 안목만 혼란하게 하여 이름이나 떨치는 환쟁이가 아닌 畵格, 즉 전인적인 인간으로서의 품격이 조화된 藝人의 자긍적인 품위를 솔선수범 하여, 소치는 스승과 닮은 길을 일생동안 단심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