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歲寒圖>에 나타난 사제간의 모습(3)

clara jeon 2020. 1. 4. 17:04

지난해에는 桂馥 『晩學集』과 惲敬 『大雲山房文藁)』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賀長齡이 편찬한 『황皇朝經世文編』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太史公 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도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汲黯과 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다라 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下邽縣의 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오주석, 1999).

이 글에서의 인용된 太史公 司馬遷, [史記] <鄭世家>의 炎涼世態의 등장인물, 춘추전국시대 정나라의 姦人 厲公과 甫假 그리고 前漢시대 어진 이 汲黯과 鄭當時 등 인물들이 함의는 秋史家를 風飛雹散, 멸족시키려한 안동김문이 國是를 壟斷한 순조, 헌종대의 炎涼世態와 무관하지 않다. 더욱이 추사의 속내를 深意로 헤아리려면, 인용된 억울하게 죄를 입은 李陵장군을 정정당당히 변호하다가 漢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宮刑을 받았던 사마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사마천은 丈夫로서 최대의 치욕인 궁형을 받고서도 끝내 자결하지 않고 뭇사람들의 조롱을 견디며 천추의 명작 『사기』를 완성해낸 自尊의 역사적 인물이다. 이들 인물들의 인용 속에서의 추사는 추사가의 家禍를 암시하고, 두 차례나 태사공의 말을 인용하고 ‘슬프다!(悲夫)’ 라는 문체까지 본받은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사마천과 동일시, 그런 추사의 뇌리에는 사마천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유배생활을 결코 헛된 나날로 보내지는 않겠다(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1, 솔:서울, p156,2011)는 비장한 決意를 자신에게, 우선에게 각인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絶海孤島 遠惡地 위리안치 유배의 땅에서 스승으로서의 匕首와 같이 날선 추사체의 발자국을 심어놓으며謫所原近負者如市纔數月人文大開彬彬有京國風眈羅開荒自公始(『阮堂先生全集』, 卷 一, 小傳)살고자 하는, 살아가고 있는 孤高한 기상이 깃들어 있는 文氣있는 스승의 마음그림, 歲寒의 허공에 새잎을 돋우고 있는 老松 추사를 받들고 있는 올곧은 잣나무가 곧 자신임을, 늙은 소나무의 새순이 자신의 백아절현의 의지임을 읽은 藕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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