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師弟間의 道理『藝林甲乙錄』에 나타난 스승의 모습(4)

clara jeon 2019. 12. 26. 17:22

도판(310-311)의 실제 작품을 보면서 추사의 화평을 읽어보면 그가 실작품 지도에서도 법고적인 이론과 文字香 書卷氣의 神似的인 內面性과 形似의 外面을 아우르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문인화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추사는 제자들의 그림에 각 개성과 부합되는 石濤와 南田, 深靑門의 예를 들어 그의 법고창신 화론을 펼치면서 문인화의 정수를 제자들에게 개진시키고 있다. 즉 제자들에게 실제 제작과정에서의 수행할 점과 성취에 대한 지도와 지원을 제공하는 스승 추사의 긍정의 피드백은 앞으로도 작품을 창출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 자신의 정체성과 작품 제작에 희망을 품은 제자들은 그 꿈의 달성을 위해, “얻은 자로 하여금 부르르 떨며 정진하게 하고 잃은 자로 하여금 두려워 고치어, 근원과 끝을 연구해 풀어내고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리어 바로잡아, 모두 그 잘못된 길을 벗어나 바른 문을 두드리게 하고, 八功德水에 대중이 목욕하여 다 함께 청정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추사는 창작의 조건으로 인격 수양과 학문에 의한 문자향 서권기를 전제하고 있으며, 法古만큼이나 그를 넘어선 자유로움과 다양성의 세계를 중시, 이는 “고인들이 마음으로 전하고 받은” 靈性의 영역이니 언어나 형상을 벗어나 작가 주체가 자득한다고 보아, 제자들의 개성에 근거한 학습법, 즉 작가 주관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그리고 재능과 더불어 끊임없는 노력으로 기술이 아닌 격물치지의 大雅의 예술론을 제자들에게 제시, 요구하고 있다(정혜린,[추사연구]3호,<추사의 예술을 다시 본다>,p75-81). 추사는 이 화론에 어긋나는 제자들의 그림에 일일하게 자상스런 지적과 경계, 유숙에게는 그림에는 반드시 손님과 주인이 있어야 하고 이를 뒤집어놓을 수는 없다, 박인석에게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畵心이 한 폭의 핵심이 되는데 여기서 전연 변환하는 뜻이 없다, 김수철과 전기에게는 그림에서 작가의 주관적인 心想이 없이(神似) 한갓 그 껍데기만 취한다면(形似) 환쟁이 그림이 되니 누가 그렇게 그리지 못하겠냐고, 감각과 통속의 淺薄함을 백안시하는 大雅의 예술론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스승, ‘도에 담론을 할 제면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제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이나 따스한 햇볕 같은’ 書畵評語의 가르침을 입은 묵진 8인, 화루 8인은 고람의 비유, 八功德水에 洗手, 그른 것들이 바로 잡혀 잘못된 길을 벗어나 추사의 원대한 가르침, 문인화풍의 本道를 평생 主旨하였을 것이다.
      文人畵의 本道란 조형 외적인 요소, 묘사력이나 데생력 보다는 인품과 교양, 즉 추사가 늘 주창한 문자향 서권기의 一片丹心을 전제로, 작가의 정신세계가 文字氣로 내면화된 神似의 관념화이다. 따라서 장인적, 인위적인 기술, 기교보다는 영혼과 육체가 一致疏通하는 격물치지의 至高의 畵道이다. 필자는 이들이 비록 畵因으로 보름간의 짧은 畵道 배움의 시간을 스승과 함께 하였지만, “근원과 끝을 연구해 풀어내고 바르고 그른 것을 가리어 바로잡으셨으니 모두 그 잘못된 길을 벗어나 바른 문을 두드리게 하고자 하심”은, 『藝林甲乙錄』의 동호인에게 추사를 적천리의 스승으로 평생을 동행, 모셨을 것이라고 추단한다. 이 책이 엮어져 그날의 동호인에게 보여준 해가 추사가 제주에서 해배된 다음해인 1849년이니, 10여 년의 절도에서 세한의 귀양살이를 한 추사가, 그리고 그날의 제자 14인이 이를 보았다면 감회가 가히 어떠했는지는 그 感泣의 情景이 짐작하고도 남음 된다. 결국 『藝林甲乙錄』의 묵진 8인, 화루 8인은 이런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서화에 열중하여 이들은 문인화풍의 그림과 입고출신의 서체를 추구하는 완당바람의 주역으로 성장한다(유홍준,[완당평전]1,p313). 추사는 제자들에게 참으로 지극정성으로 가르침을 주었고 은혜를 입은 제자들은 文人書畵本道 學藝工夫의 길에서의 자존으로 자득한 정체성으로 자신만이 창조할 수 있는 작품을 창출하였다. 추사가 적천리의 스승으로 제자들에게 선사한 선물은 항상 스승이 자신들의 희망, 자신감으로서 상징적인 존재감일 것이다. 스승이 百尺竿頭 波瀾萬丈의 굴곡진 삶에서도 直道以行 平心精氣의 博學篤行, 水流花開로 結晶한 학예의 지고한 경지는 제자들에게 꺾이지 않는 기개로, 조선후기 末流의 학예계에 서슴없는 선각자로 개화의 완당바람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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