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적 의미화-<인재설>-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개선(1)

clara jeon 2019. 11. 18. 14:53


박학청논 Ⅲ.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적 의미화-인재설-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개선.hwp


     4차 산업혁명시대는 초고속 연결망, 초지능, 즉 “4차”에 응축된 의미는 인간의 지적 능력이 개발한 기술이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삼차원을 초월한 초공간, 시간의 기술 융합을 말한다. 이미 초고속, 대용량, 초연결, 초실시간의 5G(5generation)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5G” 명명함에는 4차를 넘어선, 미래에 한 걸음 다가선 5차 산업혁명시대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현실은 1G 기껏해야 2G세대에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듯,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한국의 교육에 대해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나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 정보,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평가, 이는 교과별 지식과 정보전달 위주의 현재의 학교교육체제로는 미래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다(정흥인 외, <4차 산업혁명시대 생애단계별 미래 인재 필요역량 및 우선순위 역량도출>,[평생교육연구], 제4호, 2018, p.62).
      추사는 <인재설>에서 “사람이 비록 재주는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의 生長한 곳을 보아야 한다. 궁벽하고 적막한 곳에서 생장한 곳”에서 성장하면 “마음이 세련된 바가 없고 흉금이 풍만해지지 못하여 耳目이 이미 협소함에 따라 手足 또한 반드시 굼뜨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지금의 5G시대에서 엘빈 토플러가 지적한 “하루 15시간 동안 학교나 학원에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 정보, 직업을 위해” “촌스럽고 고루한 지식”을 재현하고 있는, 1G. 2G의 우리의 교육 현실과 比肩되는, 교육목표의 진실한 방향성이 희석, 상실한 환경의 실상을 의미한다.
      교육의 목적은 현재의 배움을 바탕으로 과거의 문제점을 반성, 해결하여 지금 여기의 삶을 개선, 정진하여 내일의 삶을 창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미래의 삶을 성숙하게 하는 “맛”나는 배움이란 기존의 틀 속에 갇힌 재현이 아니라 애벌레를 탈피한 나비의 비상, 도전과 도약을 향한 창조의 새 맛이 깃들여 있어야 한다. 온고지신, 법고창신 역시, 단지 붕어빵 틀에서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이 아닌 옛것의 틀 속에서 다양한 모양새의 물고기들을 창출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움으로서 삶은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공자도 “朝聞道 夕死可矣” 배움의 즐거움으로 도를 깨우침이 죽음을 능가할 수 있음을, 추사의 말년의 시 “平生操持力 方知學爲福” 함의는 배움의 순간들이 지적으로 영적으로 “좋다”라는 쾌감으로 우리의 뇌 속에 엔돌핀이 노래한다는 뜻,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탐구 성향은 眞善美의 포괄적인 의미, 진선미란 보기에 듣기에 그 맛이 “좋다”에 있듯이 공부의 길 역시 예외의 길이 아니다. 배움이란 인간이 지적, 인격적, 기술적, 영적으로 성장하는, 이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을 추구하여 最善의 인간다운 인간으로 사는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앎을 더욱 깊이 있게 하는 과정으로 존재에 대한 깊은 물음과 성찰에 뿌리박지 못하는 한, 그것은 특정한 단편적인 기능을 높여줄 수 있을지언정 결코 인간에게 근원적이고 지속적인 행복, 좋은 삶을 가져다 줄 수 없다(심승환, [인간의 삶과 배움], 박영story, 2015, p.머리말). 현재의 대학입학을 위한, 추사 당대의 과거에 입격을 위한 공부, 막상 시험만 끝나면 그 공부한 내용이 내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일로, 산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의 나열([오직 독서뿐], 정민, 김영사, 파주, 2013, p.33), 그리하여 삶이 인간의 맛이 깃든 멋진 삶으로 변화되지 못하는, 추사 당대나 현재나 그저 업그레이드 못한 공부벌레들은 온전하지 못한 인성이나 덕성으로 불행한 삶이 피폐하다.

박학청논 Ⅲ. 추사의 교육관과 현대적 의미화-인재설-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개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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