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교육관의 현대적 의미화-<인재설> 과거제도와 대학입시 문제점(21)

clara jeon 2019. 11. 2. 16:53

     필자는 이쯤에서 학생들에게 묻고 싶다. 반드시 대학을 가고 싶은가? 대학은 자신이 좋아하는, 즐기며 하게 되는 학문에 저절로 천착하게 되어 그를 혼신으로 연구하여 그 연구 결과물의 실용성을 전수하는, 말 그대로, “학문의 전당”이다. 초중고 그 공부의 나날들에서 자신의 적성을 이미 善定,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학예를 위해, 전인적인 기초를 다진 후, 즉 인간으로서의 道理와 禮를 갖춘 후에 전공의 길로 들어서는 “大學”이다. 필자는 입시생들에게 이를 다져주고 싶다. 자신의 길을 걸어라. 수업시간에도, 부모들에게도 둘러리로 얻어 들으며 얻어 먹으며 障礙, 기생충으로 앉아있지 말라. 학예는, 대학은 아는“척”하며 잘난 “폼”내는 둘러리로서 성취될 수 있는 소란스런 허섭한 경지가 아니다. “척, 폼” 浮游하는 껍데기들은 후지부지 삶의 뒤안길로 결실없이 사라지게 하는 어찌보면 철저한 실력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전쟁터이다. 따라서 이들 學藝戰士들은 이 진선미의 싸움, 고단함을 나름의 개성과 창조로 즐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삶의 현실 상황은 모질게도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부모가 전전긍긍 자식의 삶을 상류층으로 밀어올리려 탈탈 털어도 고착화되어버린 금은흙수저 신분계층에는 틈새 시장은 드물다. 진심으로 충고한다. 정말로 학예에 전생애를 걸고자 하지 아니하면 대학을 버려라. 어줍지 않은 실력으로 “펜대나 굴리며 책상에 앉아 ‘척폼’으로 편하게 살겠다”? 그곳이 척폼의 지옥, 죽음살이다. 진심으로 말하거니와 부질없이 대학에 쏟아붓는 막대한 예산은 청년들 결혼장려금과 창업지원금으로 쓰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한겨레신문, 김상봉, [김상봉, 씨알의 철학] 대학은 꼭 있어야 하는가,2019-10-02 ). “敎育”이라는 말을 풀이하면 피동의 의미, 학생의 일상의 자리, 먹고 입고 자고 공부하는 자리는 누구에 의해, 어디에 의한, 지시, 지휘, 지적, 요청, 명령 등 피동의 자리이다. 순종과 순응이, 맹종이 의식주를, 등등 여타의 즐기기를 포만감으로 길들여지기도 하는, 그러나 한 걸음 더, 더 깊은 생각으로 접어들면 그 삶의 자리가 인간의 삶 자리가 아니라 죽을 것 같은 지옥이면, 아직은 그곳에서, 버티고 인간답게 살아남으려면, 결단코 내 삶의 진로를 내 태도로 정해야 한다. 고삼 정도면 의식주 정도는 스스로 해결할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얻어먹고 죽어가는 영육이 환경적인 장애로 병든 폐인보다 길에 나선 희망의 미래가 있는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일단, 거지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사회가 부모가 어쩌거나 말거나 내가 나의 삶을 산다. 사회가 학교가 부모가 바뀌는 더딘 속도에 젊음은 속절없이 삭아진다. 구세대들이 “꼰대”를 고집하면 개혁되지 않으면 개혁되기를 멍청하게 삭아지면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개혁해야 한다. 기생충으로 삶의 뒷길에서 어정쩡 후지부지 허섭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거울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학생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라. 자식의 길을, 학생의 길을 다듬어주지 않고 자식을, 학생을 私物로 惡用하는 독단, 농단적인, 범죄적인, 비인간적인 부모와 교육가들도 세상에는 무수하니 말이다.
      [예림갑을록]을 보면, 추사의 금강안 혜안은 인재 발굴에도 착시는 없었다. 추사는 그의 문하에 들어서는 학인들의 개성과 성품을 통찰하여 그들에게 일일이 맞춤으로 實事, 적천리적인 교육을 究施, 求是하였다. 추사와 평생을 동행한 그의 제자들 중에는 父子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추사는 학인들을 문하에 들일 때, 단지 그 학생의 재능만이 아니라, 그의 자라난 환경, 즉 가계의 내력, 가족관계, 부모의 직업, 성품 등 전반을 학예를 연마할 조건으로 헤아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추사가 권문세가의 자제만을 문하에 입문하게 하지는 않은 것은 당연하다. 앞의 글에서 논지한 바와 같이 추사의 제자들의 신분은 중인, 천민, 양반층 등 다양한 계층으로, 추사는 제자의 기준을 어디까지나 인성을 위주로 한 전인적인 성품을 우선으로 선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