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교육관의 현대적 의미화-<인재설> 과거제도와 대학입시 문제점(13)

clara jeon 2019. 11. 2. 16:43

제술과(製述科)를 반드시 논(論)·책(策)·표(表)·부(賦)로 하도록 법을 만들었음은, 논에서는 그의 논의(論議)능력을 보고, 책에서는 그의 시무(時務)에 대한 소견을 보기 위한 것이고, 부에서는 그의 문리(文理) 재주를 취하고, 표에서는 관각(館閣)에 두고 쓰기 위한 것으로서, 정해 놓은 바 제도가 또한 모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위에서 현명한 사람을 추거(推擧)하여 함께 나라 일을 해 갈 적에도 반드시 이 제도대로 하고, 아래에서 출신(出身)하여 임금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도 또한 이 방도로 했으니, 어떠하든지 과목의 제도는 진실로 조정의 일대 정책인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래 되니 폐단이 생겨나고, 명칭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실지는 효과가 없게 되었다. 조가(朝家)에서 과거를 설행한 것이 전후에 어찌 한정이 있었는가마는 현명한 사람을 구득했다는 칭찬을 듣게 되지 못했고, 출신한 거자(擧子)의 종무(踵武)가 서로 접하게 되었지만 세상에 수용(需用)이 될 만한 인재는 있지 않았으니,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해 놓은 본뜻이 어디 간 것인가? 마침내 폐단에 따라 제도를 고치고 시기를 보아 합당하게 맞추어 가되, 조금은 옛적의 법대로 두고서 고시(考試)의 규정을 엄격하게 하고, 대강 옛적의 제도대로 모방하여 선거(選擧)하는 정책을 닦아 간다면, 이는 어찌 《역경(易經)》에 이른바 ‘변경해 가면 통해지게 되고 통해지면 오래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만근(挽近) 이래로는 세태(世態)의 수준이 갈수록 낮아지고, 과거의 폐가 더욱 심하여져서 거자들은 한결같이 분치(奔馳)하려고만 하여 주자(朱子)의 시에 경계해 놓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거업(擧業)을 세 갈래로 나뉘어져 선유(先儒)들이 교훈해 놓은 것을 깊이 유념하지 않고 있고, 시관(試官)들은 시를 짓는 재능의 감식(鑑識)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질없이 동홍 선생(冬烘先生)이란 기롱을 자초하고, 출척(黜陟)이 공정하지 못하여 더러는 홍분방(紅粉榜)을 만들어 내고 있다. 형창(螢牕) 아래서 고생을 한 선비는 파수(灞水)를 건너는데 흘린 눈물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어(魚)와 로(魯)도 분별하지 못하는 부류들이 도리어 등룡(登龍)의 기쁨을 차지하게 되었다. 과장(科場)에 임하여 거듭거듭 금단해도 마침내 실효가 없어 한갓 국가의 체면만 손상하게 되고, 허다한 폐습을 한결같이 그대로 맡겨 두어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바로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 비단옷 입은 자제들이 요행으로 한 번 급제하게 되면 재질이나 학문이 어떠한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화관(華貫)과 현직(顯職)은 그만 저절로 온 것처럼 여기고 있다. 이는 단지 오늘날에 있어서 한심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앞날에 시관(試官)이 되어 선비를 뽑는 일을 또한 장차 이런 무리들의 손에 맡기게 될 것이다. 《송사(宋史)》에 말한 바 ‘못된 종자가 유전된다.’고 한 것과 같은 일이니, 또한 어찌 크게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선비들을 둘러 보건대 과거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인가? 사람이 과거를 더럽히는 것인가? 선비인 사람들이 젊은 때에 바로 마땅히 천하의 정당한 사리를 강구해야 하는 법인데 그만 도리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시부(詩賦) 짓기만을 배우고 있고, 학문하는 공부와 심성 방면에 있어서는 울타리 가의 물건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법이 사람들의 재질을 무너뜨려서 옛적과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이 되었다. 양관(楊綰)이 이른바 ‘공경(公卿)들이 이런 것으로서 선비를 대우하고 어른과 늙은이들은 이런 것으로 자제들을 훈육하고 있으니, 순박함으로 돌아가고 엄치와 사양을 숭상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다. 아! 취사하는 방법은 향거(鄕擧)와 이선(里選)보다 나은 것이 없고 공령(功令)으로 고시(考試)하는 것보다 좋지 못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