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교육관의 현대적 의미화-<인재설> 과거제도와 대학입시 문제점(14)

clara jeon 2019. 11. 2. 16:44

삼대(三代)의 융성한 시절에는 벼슬하는 길이 두 가지가 있었으니, 향학(鄕學)으로 경유해서 진출하게 되는 경우에는 향대부(鄕大夫)가 관장하여 대사도(大司徒)에 임용되고, 국학(國學)을 경유해서 진출하게 되는 경우에는 대악정(大樂正)이 관장하는데 대사마(大司馬)에 임용되어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의 교육을 실시하여 빈흥(賓興)하되, 선사(選士)·준사(俊士)·조사(造士)라는 명칭으로 구분하여 작록을 주었으니 오늘날에 이 법을 다시 시행할 수 있겠는가? 과장(科場)에서 간계를 방지하는 방법은 황조(皇朝)의 격옥(隔屋) 제도보다 준엄하게 되어있는 것이 없다. 옥자(屋子)를 매우 든든하게 짓고서 수직하는 군사를 배치하여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고, 고시하는 규정도 내외로 나누어 발을 치고서 안쪽은 고시관이 주관하고 바깥쪽은 감시관이 주관하게 하고, 또한 제조관으로 하여금 총찰(總察)하게 하였다. 오늘날에 이 법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대저 과거법이 이미 창시된 이래에 입법한 의미가 매우 좋게 되어 있었던 것은 오직 서한(西漢)의 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조정에서 구득하려는 사람은 오직 현량(賢良)한 인재와 효렴(孝濂)한 선비인데, 반드시 예절을 갖추어 이리저리 찾아내고, 사자(士子)들이 학습하는 바는 오직 당세의 시무(時務)와 선성(先聖)의 학문이었고, 자신을 팔거나 쓰이기를 바라는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선유(先儒)의 이른바 ‘옛날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 현명한 사람을 찾아내는 요도(要道)를 깊이 얻은 것이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오늘날에 이 법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옛적에 과거법을 말해 놓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진실로 주부자(朱夫子)의 공거의(貢擧議)처럼 두루하고 신중하며 자세하고 세밀하게 된 것은 없었다. 그 공거의에 ‘제경(諸經) 및 사서(四書)는 해를 구분하여 시의(試義)하고, 제사(諸史) 및 시무(時務)는 또한 다음 해에 시책(試策)하여, 경서(經書)를 전공한 사람은 가법(家法)을 지수(持守)해 가게 하고, 답의(答義)한 사람은 경사(經史)를 통관(通貫)하게 한다면, 선비로서 경서를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되고 역사를 통하지 못한 것이 없게 되어, 세상에 쓰이게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에 비록 상문(上聞)하게 되지는 못했어도 천하에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선유의 이른바 ‘후세의 공거법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있지 않았다.’고 한 것이 헛된 말이 아니다. 오늘날에 이 법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과거 폐단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개혁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옛것에 어둡다고 하여 지금의 것에 구애되어도 안되며, 또한 지금의 것에 집착해서 옛것에 소홀해서도 안된다. 진실로 능히 옛적의 것을 참작하고 지금의 것을 참조하여 이 때에 맞도록 합당하게 해 간다면, 비록 성주(成周) 때의 제도와는 같지 않더라도 자연히 향거(鄕擧)의 의의가 있게 될 것이고, 황명(皇明) 때의 법과는 같지 않더라도 자연히 격옥(隔屋)의 규정이 있게 될 것이며, 서한(西漢)의 법규와는 같지 않더라도 현량(賢良)한 선비와 효렴(孝廉)한 선비를 구득하게 될 것이고, 주자의 공거의와는 같지 못하더라도 경사(經史)를 해를 구분하여 해 가는 규정을 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연 옛적의 뜻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니, 또한 마땅히 오늘날에 시행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부(政府)와 관각(館閣)의 신하들에게 묻는 것이니, 각기 의논하여 올려야 한다." 하니, 여러 신하의 헌의(獻議)가 참차(參差)되는 것이 많았다. 임금이 초원(初元) 때부터 반드시 과거의 폐단을 통쾌하게 고치려고 했으나 경장해 가기가 어려워 마침내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