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權敦仁(6)

clara jeon 2019. 1. 18. 15:21

이재의 비호, 반복하여 丁寧스럽게 힘써 일깨워주는 격려와 위로에 추사는 “나는 오직 두 주먹을 굳게 쥐고 여기에 힘껏 노력하여, 뜻을 더욱 견고하게 세우고 몸을 확고하게 가지고 지켜서, 끊임없이 전진하여 혹시라도 이것을 실추시키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라 용기백배로 다시 백척간두 絶島에서의 삶을 푸르게 하늘을 향해 일으켜 세우고 있다. 뿐만아니다, 이재는 추사가 제주 遠惡 孤島에서 피폐할 無用之物이 될까 염려되었던지, 추사가 제주에 온 지 5년째 되는 1845년 5월 22일 제주도에 異樣船이 출현하여, 당시 조정에서도 이 이양선의 출현을 보고받고 논의했지만 별 대책이 없었는데, 이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재는 이 문제를 추사에게 문의하여, 추사의 견문과 학식이 당대 최고, 그 自負心이 실추되지 않도록 정녕스럽게 감싸주었다. 당시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의 본질, 西勢東進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서양에 대해, 국제정세에 대하여 추사만큼 박식하고 넓은 견문 있는 학자, 그러나 추사 역시 당연히 문명의 이상적인 모델은 청나라라는 시대적인 상식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역량이었으므로, 미구에 일어날 셔먼호 사건 등을 예측하지 못한 채로, 영의정 이재의 문의, 番舶들의 출몰에 국가 시책까지 제시하는데([완당평전]2, p 423)

番舶들이 남북으로 出沒하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걱정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들이 1년 중에 出港하는 船隻만도 만 척에 가까운 숫자가 천하를 두루 떠돌아다니는데, 중국에서는 모두 이들을 대수롭잖게 보아 버립니다.
최근 英夷 사건의 경우는 특히 별도의 事端이 있는 것을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累가 미칠 것이 못 됩니다. 또 그 10여 척의 배가 과연 英夷입니까, 佛蘭西입니까, 班呀입니까, 葡萄亞입니까, 單鷹입니까, 雙鷹입니까? 어느 나라 배인지는 분간할 수 없으나, 결코 한 나라의 배는 아닐 것입니다. 설령 분간이 된다 하더라도, 정처 없이 언뜻 재빠르게 가버린 것을 또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
나의 어리석고 옅은 견식으로는 별도로 깊이 근심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저 번박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연히 소동을 벌이어 심지어 농사를 폐하고 피해 도망을 가는 지경에 이른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위로는 方伯에서부터 아래로는 州倅(수-책) 縣胥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께 소동만 벌일 분, 누구 하나도 백성들을 존무하고 안집시킬 뜻이 없어 그들을 뿔뿔이 흩어지도록 내버려 두고서, 그들이 떠돌다 굶어 죽는 일이 바로 앞에 닥쳤는데도 그것은 돌볼줄을 모르고 한갓 번박에만 탓을 돌리어 마치 ‘내 잘못이 아니라, 흉년이 든 때문이다’는 말고 같이 하고 있으니, 나는 季孫의 근심거리가 顓臾에 있지 않고 蕭墻 안에 있을까가 염려됩니다.
지금 당장 급급히 백성들의 소동 없애기를 도모하는 계책이 바로 제일가는 계책인데, 廟堂에는 여기에 생각이 미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성들에게 소동이 없어진다면 비록 천만 척의 번박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말을 하자니 매우 통탄스러워서, 賈生의 하나의 長太息에 그칠 뿐이 아닙니다. .....([완당전집] 제3권, <書牘>, 與權彝齋敦仁, 第三十二)

원악도 제주의 남쪽에 위리안치된 몸이면서도 영의정 벗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있다는 추사의 經綸하는 자세, 이처럼 스케일이 크고 자신감이 넘치며 학문을 위한 학자가 아니라 경륜을 위한 학문을 몸으로 실천([완당평전]2, p.421)하는 추사의 선진적인 실사구시의 삶, 이를 따라주지 못하는 당대의 관료들의 견식이나 국가 시책에 추사와 이재의 公憤心을 짐작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