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權敦仁(7)

clara jeon 2019. 1. 18. 15:26

      다음의 서찰은 진흥왕 순수비 네 개의 碑, 황초령비. 북한산비. 창녕비. 마운령비 중 이재와 추사의 합심한 노력으로 땅 속에 파묻혀버려 형체를 찾을 수 없었던 황초령비를 복원한 내용이다. 이 서찰을 읽어보면 추사의 금석학적. 역사학적 식견과 실재하는 금석이 국사책보다 나은 점, 금석이 하나의 古物이 아니라 역사의 증거물로서의 가치성, 조금이라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遺物에 대한, 더 나아가 나라 사랑에 대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으며. 이를 지음한 이재의 노력 또한 嘉賞하여 제32신 중에 黃草嶺碑에 대한 부분, 전문을 옮긴다. 추사의 나이 47세 되는 1832년 10월 25일, 벗 권돈인은 함경감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추사는 권돈인에게 함흥에 가거든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봐 달라고 간곡히 부탁, 그리하여 이 비가 재발견되는 과정을 보면

眞興王碑가 하나는 朗善시대에 나타났고, 또 하나는 兪文翼公 시대에 나타났는데, 끝내 그것을 알려고 물어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咸興府使 尹光濩가 대략 몇 本을 탁본하였는데, 그 후에 官에서 탁본한 것을 인하여 백성들이 마침내 그것을 파묻어 버리므로써 형체도 그림자도 없어진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弟는 이 碑에 대해서 苦心한 것이 있어 매양 북쪽에 가는 사람을 인하여 널리 찾아 보도록 요구하였으나 끝내 한 사람도 그 말에 응해준 자가 없었으니, 저들이 어떻게 이것을 알겠습니까.
낭선의 시대에는 이비가 두 조각이 다 있었는데, 유 문익공 시대에는 이 비가 이 한 조각만 남고 아래 한 조각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다시 아래 한 조각을 얻는다면 더욱 신기하겠지만 아마 기필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대개 이 비는 한갓 우리나라 金石의 始祖가 될 뿐만이 아닙니다. 新羅의 封疆에 대하여 國史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겨우 比列忽 -즉 安邊- 까지에만 미쳤으니, 이 비를 통해서 보지 않으면 어떻게 신라의 봉강이 멀리 黃草嶺까지 미쳤던 것을 다시 알 수 있겠습니까. 금석이 국사보다 나은 점이 이와 같으니, 옛 사람들이 금석을 귀중하게 여긴 까닭이 어찌 하나의 古物이라는 것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또 하나의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이 비가 중국으로 말하면 陳나라 光大 연간에 세원진 것인데, 六朝시대의 금석들이 지금 약간 남아 있는바, 그것들이 이 비의 書體와 서로 흡사하니, 그때에 중국과 외국의 風氣가 서로 멀지 않았음을 볼 수 있고, 그때에 신라 사람들이 중국의 서체를 마음으로 본뜨고 손으로 따르고 했던 것을 또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체는 隸書와도 비슷하고 楷書와도 비슷한데, 이것이 바로 육조 시대의 서법은 오히려 옛 법규를 거슬러 따라서 破體로 쓰지 않는 것을 精妙하게 여겼던 까닭이니, 이것이 또 증빙의 자료가 될 만합니다. 또 夫知. 及干등의 官名. 人名에 이르러서도 국사 이외의 것을 자세히 상고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弟가 이 비에 대해서 眞興二碑攷 한 권을 찬술하였는데, 一字. 一畫과 一地. 一官을 모두 자세하게 확증한 것이 한 권의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삼가 이번에 우러러 바치고는 싶으나, 아직 草稿로 있고 미처 정리를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정리를 한 다음에야 열람을 할 수 있으므로 지금은 보내 드릴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지금 이미 비를 얻고 나서 또 이것을 우거진 잡초 사이에 버려둔다면, 대감께서 돌아오신 뒤에는 반드시 또 매몰되고 말 것입니다. 진흥왕의 豐功盛烈이 담긴 한 조각 빗돌이 세간에 남아 존재해 온 지가 이미 천 년이 지났고 보면, 반드시 煙雲의 變滅과 함께 따라서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니, 후인들이 그를 높여 꾸미고 포장하는 도리에 있어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그러니 지금 營下로 가져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 일을 크게 벌여서 영원히 잘 보존되도록 하는 조처가 있지 않는다면 또 이것이 어디로 굴러가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또 이 비가 원래 있던 곳이 봉강을 拓定한 實跡이고 보면,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또한 어떨까 싶기도 하니, 만일 그 비가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두고 영원히 보존할 계책을 마련한다면 참으로 더욱 좋겠습니다.([완당전집] 제3권, <書牘>, 與權彝齋敦仁, 第三十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