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權敦仁(8)

clara jeon 2019. 1. 18. 15:35

함흥에서 200리 황초령 고개 위 있었던 이 비의 탁본을 양반관료들이 거듭거듭 요구,그 고장의 백성들이 농사를 짓다가도 나무를 하다가도 붙들려 가 탁본 뜨는 데 동원되니 먹고 사는 것만도 힘겨워 죽을 지경인 힘없고 죄없는 시골 사람들이, 계곡 아래로 아예 형체도 없게 밀어버린, 그러나 추사는 외가 쪽 어른인 유척기 집안에서 이 탁본을 본 적이 있었고, 이 비가 갖는 역사상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재에게 편지글로 간곡히 부탁을 하였으니, 이재는 황초령비의 역사성을 지음하여 결국 찾아내어 탁본을 하여 보내준 것이며, 추사는 옛 비의 보존의 기본원칙을 현명하고도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다.([완당평전]1, p.252- 257) 더욱이 추사는 황초령비의 재발견, 이에 만족치 않고 다시 진흥왕 순수비를 연구, 추사의 대표적인 금석학 논문 <진흥2비고>라고도 부르는 [예당금석과안록]을 이 무렵에 저술하였다고 추이되어진다. 이들 知音知己로 인한, 함흥에서 200리나 떨어진 遠惡 계곡에 굴러 떨어져 있는 비의 탁본을 보내준 이재의 성의, 추사의 연찬은 하마터면 신라 영토확장의 북쪽 경계비의 상실을, 실물로도 저술의 기록상으로도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권돈인은 이 비를 추사의 현명한 조언대로 보존하지 못하였다. 추사는 20여 년 후 북청 유배 시기, 후배이자 제자인 침계 윤정현이 함경도 관찰로 부임하자, 황초령비를 원위치에 복원하게 해줄 것을 부탁, 추사의 극성스런 열정과 그 집요함을 잘 알고 있는 침계는 그 뜻을 받들어 시행, 황초령 고갯마루 본자리까지는 올리지 못하고 황초령 아래 中嶺鎭까지는 옮겨 세워 비각을 지어 보호하도록 조치, 추사에게 이 비각 현판 글씨를 부탁, <진흥북수고경> 현판을 달았다.(도판 313 p. 624 탑재[완당평전]1, p.622- 624) 추사가 신라 땅을 경계 짓는 이 비의 역사적인 가치, 당대의 官名. 人名의 확인,신라시대의 육조 시대의 서법의 증빙 자료로서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찾기를 고심한지 30년 만에 <진흥북수고경>비각에 현판까지 자필 할 수 있어, 추사의 愛國的인 집요한 추적으로 통일신라의 국토, 더 나아가 한민족의 기상이 깃든 영토확장의 역사성을 상실하지 않고 일단락 매듭지을 수 있었다.
      추사와 이재의 이러한 물과 물고기의 우애는 그들의 삶이 유배 등의 가뭄으로 곤혹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水魚之交, 변함이 없었다. 다음은 권돈인이 안동김문 일파인 삼사의 합계로 낭천의 중도부처 3개월 후 경상도 순흥으로 移配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위로한 서간문에도 드러나 있는, 斷金之交,앞의 글에서 서술하였으나 추사와 이재 동행한 삶의 양태 중 가장 이들이 모습이 아름다워 다시 그 일부를 발췌한다.

“끝없이 변천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잡아 정할 수 없는 것이니, 비록 백 번 천 번 변환하는 가운데 閬風 . 懸圃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편안한 대로 하고 어떤 사물의 부린 바가 되지 않는 그것이 바로 君子의 跟脚을 세우는 것이니, 뭇사람들처럼 이리 저리 정처 없이 떠돌면서 더러운 세속에 동화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결과입니다.([완당전집],1, 제3권, 書牘, 與權彝齋 敦仁, 二十六.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