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11)

clara jeon 2018. 10. 3. 19:26

  




   초정의 일생은 初志一貫,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조선의 신분차별 벽과 그 여파로 인한 사회의 不正義에 직설과 독설로 孤軍奮鬪한 直道以行의 非主流 여정이었다. 그가 비록 서출로서의 억장이 무너지는 자존감으로 조선사회와 융화되지 못해 당괴, 당벽으로 傾度, 그로 인한 폄하가 타당할 지언 정, 초정이 트여 논 苦心의 길, 後進 조선의 열등감과 청의 선진 기류를 겸허히 인정, 그를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110여 명이 넘는 청의 석학, 학예인들과 교류, 조선의 고답적인 실상에서 벗어나고자 한 후학들에게, 그가 열어 논 先進의 문을 들어서서 세상과 걸으며 깨달아, 조선후기 閉鎖의 문을 개혁으로 부수고 근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초정, 그가 진정한 本源의 주류가 아닐까.
    필자는 초정의 다음의 絶唱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초정의 스승 연암을 비롯한 북학파들의 문장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문체가 紊亂하다는, 고루한 노론계 학파의 비난으로 정조가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신 북학파 일원들에게 '文體反正'을 선언하고 純正한 글쓰기 를 하교하였다. 스승 연암을 비롯한 동료 문인들은 모두 반성문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박제가의 自訟文은 반성을 곁들여 구부러지거나 꺾어짐이 없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글이 초정의 온 心血이 아닌가. 초정의 일대기를 心讀하다 보면 비록 초정과 추사가 조선의 신분차별 속에서 물과 기름으로 삶이 일치할 수는 없었으나, 一脈相通함, 즉 박학독행으로 시대를 선진한, 구부러지거나 꺾어짐이 없이 바른 삶을 솔선수범한, 실사구시한, 인간이란 왜 사는가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실존적 평생 배움인이었음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추사의 평생배움의 삶에서 초정의 역할에 기록은 미비하여, 초정이 추사의 스승임을 인증함에 혹자들의 의문들이 있으나 필자는 초정이 연 개벽의 바람이 훗날 추사의 “완당 바람”으로 개화의 문을 열었고, 추사의 파란만장한 삶을 포진하며 개화의 길을 연 중인제자들의 계몽된 삶은 “1000년 뒤에도 1000만 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 예지적인 선각자 초정과 緣起되었다고 추단한다. 초정 박제가의 格物致知는 [북학의]의 일상의 계몽, 즉 현실의 삶에서의 실제적인 改備, 改進으로 실사구시이다. 格物은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에 대한 인간의 관심과 탐구이고, 이 격물을 통한 세계의 인식이 致知, 즉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파악한 세계관의 정립이 격물치지이다.(申昌鎬, <『大學』의 修己論>,申昌鎬,[人文科學硏究],Vol.8, 2000,p130) 추사의 격물치지는 학예적인 예술가로서의 법고창신의 실사구시 결정체, 추사체이다. 필자는 초정과 추사의 격물치지의 삶의 노정이 表面層은 갈래길인듯 하나, 초정의 自訟文과 추사체가 격물과 치지의 여정 內皮層의 길은, 結晶은 하나의 정립된 세계관의 격물치지, 동일한 맥락의 흐름으로 喝破한다.
    초정은 시. 그림. 글씨에도 개성이 뚜렷하였는데 그를 망라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著書-[北學議].[貞否集]. [貞蕤閣集]. [明農草稿].[貞否詩稿]. [韓客巾衍集].
共著(백동수. 이덕무)-[武藝圖譜通志].
繪畫-<牧牛圖>.<倚巖 觀水圖>. <魚樂圖>. <野稚圖>.<延平髫齡依母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