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10)

clara jeon 2018. 10. 3. 19:23

   그러나 [북학의]에서의 영세중소상공업자의 이익 대변, 서구 선진국의 과학기술 도입, 기술혁신, 수출 장려, 수입 금지 등은 경제적이면서 실천 가능성이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주장으로 작금에도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면 초정의 특기할 만한 주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삼철, [[북학의]의 경제사상], p.163) 필자는[북학의]의 서문을 지은 서명응의 예견 "이 책이 채택되어 현실에서 쓰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녕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조정에서 모범이 될 책을 편찬할 때에 저 솔개나 개미가 미래를 예견하는 구실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를 反芻하며, 초정의 反體制的, 反骨的인 기질 “1000년 뒤에도 1000만 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세상에 맞는 경우가 드물어” 당대의 인습에 저항하는 불화의 길 위에서 고루한 조선선비들을 향해 눈꺼풀에 붙어있는 아교와 옻칠을 떼고, 심지를 열고 이목을 확장시키라고 (필자의 앞의 글)한 초정의 항변, [북학의], 이 장장한 怒濤의 파장, 당대에는 이기적인 安慰로 伏地不動하고 있는 고루한 양반 사대부 모리배들의 멸시, 모욕, 배척 속에서 孤軍奮鬪한 초정의 불운한 삶이, 그가 살던 그때로부터 작금의 우리의 삶을 지나 미래 선진의 빛길로 여전히 “정녕” 물결치고 있다고. 그리고 추사가 청년기에 이 책을 숙독하였는지에 대한 기록도, 추사의 장서 목록에도 [북학의]는 누락되어 있으나 독서광인 추사가, 더욱이 앞의 서간문으로 보아 북학으로 巨步를 내디딘 스승 박제가의 [북학의]를 필독하였으리라 추단한다.
    초정이 마지막 연행을 다녀온 1801년은 정순왕후의 垂簾聽政期로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선두로 한 노론 벽파에 의하여 남인들, 이가환. 정약용 등이 邪學罪人으로 박해, 숙청당하는 신유사옥이 일어나고 있었다. 초정의 4차 연행은 당시 이조판서인 윤행임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윤행임이 어지러운 신유교옥의 이 시기에 흉서사건에 연루, 그 연유는 한양 동남성문에 붙었던 대비 정순왕후와 영의정인 심환지에 대한 비방 벽보의 주범 임시발과 서얼출신 윤가기와 모의하였고, 윤가기와 윤행임과의 친분으로 윤행임도 이 흉서사건에 개입하였다는 단정으로 임시발과 윤가기는 능지처참, 윤행임은 유배지에 9월 10일 사사, 이미 1797년 영평 현령 재직 시 처신이 不恭하고 말이 悖戾하다는 이유로 영의정 심환지로 부터 罷職의 陳請이 있었던 초정도 연루되어 결국은 그해 9월 16일 함경도 종성부로 정배의 명을 받는다. ([박제가의 시 연구], 박종훈, 한양대학교 대학원,2008,p.19)] 1805년 대비의 鄕里放逐 赦免의 명으로 해배되었으나,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全無, 더욱이 그의 죽음에 대해선 1815년 4월, 10월 병사, 사망 연대도 1805년 설, 석방 이듬해인 1806년 설 등의 일설들이 있어, 박제가의 말년 悲運을 推移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