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 형성과정에서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翁方綱과 阮元(서론) -1

clara jeon 2018. 12. 17. 16:38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翁方綱과 阮元.hwp

   

      


       추사 학문의 연원은 부친 유당 김노경과 초정 박제가의 실사구시적인 영향을 골격으로, 약관의 나이에 자제군관으로 부친과 동행한 연경 방문 시(1810), 청조의 대학자인 覃溪 翁方綱(1733-1818)과 芸臺 阮元(1764-1849)과 단 한 번의 대면과, 이어지는 書牘으로서 私淑으로 맺어짐에서의 실사구시적인 經學. 金石學 등을 기반으로 하는 考證學 硏鑽이라고 볼 수 있다.  옹방강과 완원은 명목상으로는 서적수집과 편찬이라는 四庫全書의 개설(1773), 그러나 실제 反淸復明의 유학자들에 대한 禁書, 文字獄 등의 禁壓으로 지속적 문화통제의 탄압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정치, 문화, 경제를 總網羅한 淸王朝의 번영 極盛期라 할 수 있는 乾隆(1736 - 1795) 嘉慶(1796-1820)시대를 대표하는 석학자이다. 

       이 시기,18.19세기의 청조 학문은 공자 이래 2천 년이 넘는 유교의 체제이념으로 경화된 주자학의 道通主義 집착에서 탈피한 절충적이며 개혁적인 복고주의, 時勢와 事實의 변화에 도리를 적응시키는 實學,즉 명말청초의 在野的 학문인 고증법을 위주로 한 문헌.骨董物을 탐구, 연찬한 고증학과 19세기 근대개혁론으로 역사적 역할이 浮刻된 經世學이 주를 이룬 시대였다.([講座 中國史 四篇-帝國秩序의 完成],<淸代의 思想>,曺秉漢,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지식산업사,2011,파주, p250) 청초 경세학은 공리적 ‘실학’ 이외에 주지주의적 ‘박학’과 복고주의적 ‘古學’의 요소를 갖고 있고 이 경세학에서는 經史에서 실증을 구하는 고증법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청조의 엄격한 문화통제에 따른 政論의 금지로 청초 경세학은 곧 쇠퇴, 이것이 재야학문으로서의 고증학의 흥기에 한 가지 배경이 되었다.([講座 中國史 四篇-帝國秩序의 完成],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지식산업사,2011,파주, p298) 그러나 고증학이 청조 초중기를 주도한 학문으로 주목되는 緣由는 청조 초기에 抗淸擧兵 反滿 무력세력에 대한 군사적 진압, 지속적인 문화 통제정책, 더욱이 康熙朝의 회유책의 일환으로 재야학자 관직 부여 등에도 불구하고, 反淸服明의 節義로 명말 사대부 在野紳士 황종희 고염무 등이, 抗淸士人의 실천적 의지의 저항세력으로서 명조의 名敎질서를 유교적 윤리 체제로서 유지하는 한편, 민생을 위한 현실정치 참여를 구체화, 實事求是적인 고증의 학문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중기에는 청조 盛世의 정신문화에 同化된 乾.嘉期 신사. 지식층들이 청왕조 정책에 호응하는 능동적인 역할과, 청초 경세학의 실사구시적인 의식이 기반이 되어,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고증법으로 연찬, 고증학을 官學的인 학문의 한 분야로 전문적으로 육성 발전시킨 “乾.嘉學派”의 기여함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담계와 완원은 이 乾.嘉期間의 고증학을 위주로 경도된 학문 성향으로, 이는 추사의 학예 전반에 深度있는 영향력을 路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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