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7)

clara jeon 2018. 10. 3. 19:12

   초정은 네 차례의 연행을 다녀왔으나, 이 글에서는 1778년, 이덕무와의 동행한 첫 번째 연행과 1790년, 유득공과의 두 번째 연행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 세 번째 연행은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정조의 특명으로 軍器寺正로 임시 임명되어 순조탄생을 축하해준 건륭제의 호의에 보답으로 다시 연경으로 되돌아간 사행이고, 1801년, 유득공과 마지막 연행이 재현되나, 조선후기, 조선인들의 전반적인 삶에 영향을 미친, 그리고 추사의 실사구시의 학예의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초정의 불후의 명작, [北學議].[進北學議]의 저술 동기로는 1.2차 연행의 서술로 충분하므로 3,4차 연행은 배제한다.
    1778년 懋官 李德懋는 당시 38세, 楚亭 朴齊家는 29세로 新進四家의 일원인 이 두 벗이 사절단을 수행해 희망을 안고 동경해 마지않던 북경으로 건너간 것은 청조 문화의 조선 유입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대사이었고, 마침 이 때 청조의 건륭학계는 최고 전성기를 맞이해 천하의 석학들과 大儒들이 구름처럼 북경으로 모여들어 [四庫全書] 편찬사업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秋史 金正喜 硏究], 총설, p.49-50) 懋官은 나무랄 데 없는 인품과 선비로서의 의리와 절개를 갖춘, 더욱이 博學無雙한 점에서는 누구도 그와 견줄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신설된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이덕무는 신예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진 정조의 각별한 인정과 총애를 받으며 서적 편찬과 교감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淸脾錄].[盎葉記]등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니, 好學의 초정과 이 둘은 당연히 규장각 검서관으로 절친한 朋友였다. 초정과 무관은 博學强期하였으나 貧寒한 서얼 출신으로 과거로 등용하지 못하다가 정조의 신임으로 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고, 서이수를 제외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은 1.2차 연행에 동행하게 된다.
    박제가 2, 3차 연행을 동행한 惠風 柳得恭은 [二十一都懷古詩] 시집의 저자로 혜풍은 이미 연경의 학예인들에게 유명인사로 흠모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박제가와 이덕무는 1778년 연행을 하였을 때 유득공이 저술한 [二十日都懷古詩]를 민족적 긍지의 징표로 연경의 학자들에게 선물하였고, 이 시집을 읽은 청조 문인들은 讚美激賞을 아끼지 않았다. 더욱이 紀昀과 같은 청조 대학자도 愛藏한 저서로 당시 *양주 팔괴의 한 사람인 兩峯 羅聘은 이 책을 구할 수가 없어 손수 베껴 手稿本을 소장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단군조선의 王儉城, 가야의 金海, 마한의 金馬, 백제의 扶餘 등 부족국가 이래로 수도가 된 적이 있는 21곳의 옛 도읍을 43수의 시로 수록한 [二十一都懷古詩]은 조선의 선후배들도 감탄한 歷史懷古 명저이다.(필자의 앞의 글) 이미 제1차 연행을 통해 많은 지기를 사귄 박제가는 두 번째 연행에서 예전에 사귀었던 벗들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은 명사, 經學의 대가 孫星衍, 詩人 張問陶, 당대 경학의 耆宿 紀昀, 畵家 羅聘 등, 청의 명현들과 학연을 맺었고, 박제가의 안내를 받은 혜풍은 가는 곳마다 조선민족의 자존이 어려 있는 [二十日都懷古詩]로 인하여 환대를 받았음은 물론이며, 기윤을 비롯한 반정균, 이정원, 이기원 공헌배, 나빙, 장도악, 오조, 장복조 완원, 유환지, 옹방수, 철보 등 건륭시대의 巨匠鴻儒들과 학연을 맺었다.([秋史 金正喜 硏究], 총설, p.6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