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5)

clara jeon 2018. 10. 3. 19:03

유년기를 회상한 이 글에는 박제가의 어린 시절 극한 가난한 삶이 드러나 있다. 박제가는 부친 박평이 죽기 전까지는 서자이었지만 그런대로 본가에서 부친의 각별한 보호 아래 그의 재능을 인정을 받으며 둘째 아들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열한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난 후, 본가에서 밀려나와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게 되었고 그의 어머니가 품삯 바느질로 몇 남매?들의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英特한 박제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당세 유명한 학자들을 가세에 관계없이 모셔다가 잘 대접하여, 그 아들만을 보고는 가난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교육 열의가 孟母와 같아, 훗날 박제가는 자신의 학문의 모든 결실은 학문에만 오로지 전념하게 한 “어머님의 어진 덕”, 희생의 덕분이라고 은혜에 감사하였다.(<朴濟家의 生涯에 영향을 미친 몇몇 분에 대하여>鄭良婉,[硏究論文集],1982, p.170) 초정은 온 심혈을 기울여 교육한 어머니의 덕분에 아버지 없이도 바르게 성장하여 “어린 나이에도 어른처럼 엄정하고 정신은 건전하고 심지가 굳으며 말은 명료하고 문식을 제거하고 질박함을 갖추어 기남자의 풍모를 갖추었다.” 이덕무의 품평, 그렇게 아들의 학문의 정진을 여념 없이 뒷바라지를 하던 어머니가 寡婦생활 14년 만인, 1773년, 53세, 초정의 나이 24세에 세상을 떠나, 초정은 유배시절인 쉰의 나이가 들어도 아침과 저녁을 이어 드신 적이 없고, 따뜻한 솜 옷 한 벌 없이 새벽녘 횃닭이 울 때까지 등불을 밝히고 쪼그리고 앉아 삯바느질하시던 모친을 그리워하며 失聲長號 하였다.
    측실의 자식이라면 조선의 신분차별제도에서 천민으로 취급을 받았던, 더욱이 본가에서 밀려난 서자로서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 홀어머니의 덕분으로 오로지 학문의 길을 절차탁마하였던 英敏한 박제가는 당연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절감하였다. 헐벗고 굶주림을 끔찍하게 체험한 초정은 安貧樂道를 理想으로 하는 조선사회를 嫌惡하고 輕蔑하였다.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북학의])

그리고 검소하게 살라는 丈人 李觀祥에게 서간으로 답하기를, 安貧樂道를 지향하는 조선 선비들의 검소함으로 포장한 가난한 삶의 허세를 다음과 같이 질타하였다.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

현실과 이상의 乖離感을 솔직하게 표현한 박제가의 글들 속에서는 反體制的, 反骨的인 성향이 짙게 버티어져 있다. 다음은 자신의 風貌와 性品을 自評한 글이다.

사람됨은 이러하다. 물소 이마에 칼 같은 눈썹 초록빛 눈동자에 흰 귀를 지녔다. 고고한 사람만을 가려 더욱 가까이 지내고, 권세 있는 자를 보면 일부러 더 멀리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 맞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려서는 문장가의 글을 배우더니 장성해서는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제도할 학문을 좋아했다.

위의 글에서는 초정의 성향이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이러한 反體制的, 反骨的인 기질은 “1000년 뒤에도 1000만 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세상에 맞는 경우가 드물어” 당대의 인습에 저항하는 불화의 길 위에서 고루한 조선선비들을 향해 눈꺼풀에 붙어있는 아교와 옻칠을 떼고, 심지를 열고 이목을 확장시키라고 怒濤하였다.
    실제로 초정은 자신의 신분이 양반들과의 친교가 불가능한 서출이기도 하였지만 초정의 스승과 친우들은 燕巖 朴趾源, 湛軒 洪大容을 제외하면 거개가 서얼출신들이었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라 하여도 연암도 담헌도 燕行를 하여 淸의 학예인들과의 교유로 북학의 선진적인 안목을 갖춘, 당대 성리학의 空理空論에 매몰된, 宋明學 말류에 휩쓸려 있는 조선선비들에게 實事求是로 반기를 든 선각자였다. 이 두 스승과의 만남, 특히 연행을 가기 전에 만난 연암은 13살 손위로 嫡庶의 신분 차별하지 않는 인격적인 사제간 인연은 초정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연암과의 만남은 초정에게 白塔 주변에 모여 살았던 연암의 제자들인 이덕무·유득공·이서구 등과 시문과 서독으로 학예를 담론하며, 선진적인 안목으로 실사구적인 학예, 북학을 탐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