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3)

clara jeon 2018. 10. 3. 17:16

그리고 추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후지츠카 치카시가 추사를,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언급하였을 시에는, 조선말기, 일제강점기의 국내학자들은 추사를 단지 조선 북학파의 계보와 함께 서예가. 금석학자로 알고 있었지만, 추사가 실은 청나라 학술의 정수를 훤히 꿰뚫은 경학의 대가였고, 조선 500년 역사상 미증유의 국제적인 대학자임([완당평전],1, p.60-61)을 밝혀 낸 후지츠카의 논지에는, 이를 뒷받침할 자료에 의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고 필자는 인정하고 간파한다. 다시 말해 金鉉權의 논지에 비해 후지츠카 논문 머리말의 起承轉의 초정 박제가와 結에서의 추사와의 연계, 행간과 행간 사이의 함의에,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라고 확정함에 필자는 초정과 추사가, 적어도 추사의 청소년, 더 나아가, 추사의 연경 방문시에 만난 *청나라 학자들의 擧皆가 초정과 친분이 있던 鴻儒 학예인들임을 볼 때,(*각주:초정과 추사가 북경에서 만나거나 서간을 교류한 청유들 중 동일한 학예인은 옹방강. 완원. 이정원. 오숭량. 섭지선. 조강. 이월정. 왕맹자. 주학년. 섭지선. 장심 등([완당평전],1, p.74. [추사연구] 제2호,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김승렬 저, 이선경 역 p.273)으로 특히 옥수 조강은 1801년 박제가가 연경에 갔을 때 만난 젊은 학자로 초정은 자신은 요즘 이런 청년을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하며 추사의 시를 보여주었는데, 1809년 추사가 연경에 가게 되었을 때 첫 인연을 맺은 학자가 조강으로, 옥수는 이 시를 기억하며([완당평전],1, p.48)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동쪽 나라에 金正喜 선생 자 秋史인 분이 있는데 올해 나이가 24세이다. 넓은 세상을 보려는 뜻을 가졌는데 일찍이 지은 시에서 “개연히 특별한 생각이 일어, 세상 밖의 지기를 사귀고 싶다. 만일 마음 알아주는 이를 만난다면, 목숨을 내줄 수도 있다. 연경에는 명사들이 많아, 부럽기 그지없다”라 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세상과 뜻이 잘 맞지 않고 과거시험을 위한 글은 짓지 않았으며 세상 밖에 널리 관심을 갖고 시도 잘하고 술도 능하며 중국을 매우 좋아해서, 스스로 동국에는 사귈 만한 인사가 없다고 말하였다. 지금 조공 사신을 따라 연경에 들어왔는데 천하 명사들을 두루 사귀어 옛 사람이 우정을 위해 죽는다는 의리를 본받으려 한다.(후 144) 추사의 청년 시기까지에는 초정과 추사는 신분을 초월한 사제관계이었음에 의미부여를 한다. 金鉉權이 “...박초정 같은 이도 간 곳마다 착오를 범하여....”를 인용하여 초정과 추사 사제간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제시함이 근거일 수는 있으나, 필자는 이 端緖가 초정과 추사의 사제간의 문제를 풀어내기에는 단선적이라고 판단하며 이를 다음과 같이 補完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연경을 다녀 온 그 즈음에 그 유명한 [北學議]를 탈고한 초정에게 글을 배우면서, 십대의 청소년 英特하고 銳敏한 추사는 청나라 연경의 발달된 문물과 그곳 학자들의 왕성한 학예 활동과 신경향을 이야기로 듣고 신기, 동경하며 이러함을 이미 견문한 북학파의 석학, 초정이 존경의 대상, 스승이었을 것이다.([완당평전],1, p.47) 그러나 직접 연행을 하고 난 후 청조 학예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과 수용을 가름할 수 있는 청장년 시기, 초정의 靑出於藍 추사는 평생지기인 권돈인에게 虛心坦懷하게 초정에 대한 객관적 시각을, 私的인 나눔인 서간문으로, 추사의 성미로 보아 知己之友에게 直言의 토로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스승에 대한 無禮함이라 판단하기 이전에, 당대의 엄연한 신분차별제에서는 권문세가의 사대부로서, 더욱이 서얼 출신 초정의 청출어람의 제자로서 당대의 석학으로서의 객관적인 당연한 비판일 수 있다고 필자는 사료한다. 그리고 다행히 신빙성 있는 자료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초정과 추사가 사제간이었다는 증거가 있는데 김승렬이 쓴 묘비문과 추사가 초정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묘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섯 살 때 춘련을 써서 문에 붙였는데 정유 박공(박제가)이 이를 보고서 남다르게 여겨 유당공을 찾아가 선생을 보고는 크게 칭찬하며, “응당 학예로써 세상에 이름을 낼 것이니 내가 가르쳐 성취 시키겠다”고 하였다.([추사연구] 제2호, <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김승렬 저, 이선경 역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