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평생배움 형성과정에서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1)

clara jeon 2018. 10. 1. 22:22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스승 朴齊家.hwp



2) 스승
(1) 朴齊家

    [秋史 金正喜 硏究]로 淸朝文化 東傳에 대해서 치밀한 硏究를 한 후지츠카 치카시는 이 연구 논문의 머리말에서 추사를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00년 이래 드물게 보이는 영특한 인물인 阮堂 金正喜가 출현해 단 한 번 연경에 들어가 方綱 翁覃溪, 元阮 芸臺라는 당대의 두 經師의 인정을 받고 또 여러 명사들과 왕래하며 청조 학문의 핵심을 손에 넣고 귀국하면서 조선 학계는 實事求是의 학문으로 급격히 진행, 전개되며 500년 이래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게 됐다”([秋史 金正喜 硏究], 머리말, p.16)라, 추사가 淸朝文化 東傳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조명하였다. 여기서 ‘東傳’이라 함, 후지츠카 치카시가 ‘朝鮮’이라 하지 않고, 추사의 역할을 구태여 ‘東傳이라는 조선과 일본을 아우르는 廣義的인 의미로 부각함의 의도를 새김질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아진다. 필자는 후지츠카 치카시의 속내를, 물론 추사의 학예가 山嵩海深하여 ‘완당바람’이 일본에까지 불어 추사 생존 시에도 ‘추사’의 작품을 서예 愛藏者들이 소장하기를 원해 추사의 글씨를 구하려는 일본인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일본인 학자로서, 일본이 강점한 朝鮮人인 추사 김정희를 연구하게 된 자신의 입장을, 더욱이 일본제국의 제일의 대학인 동경대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서의 입지를 坦坦大路 인정받기 위함이 아닌가 헤아려 본다. 반면에 유홍준은 “나는 異國의 학자가 이국의 옛 학예에 이토록 절절한 존경을 보내면서 진실되고 열정적인 연구로 일생을 살아간 사실 자체에 깊은 존경과 함께 놀라움과 고마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완당평전],1 p.61)하였다. 유홍준의 “두려움”에는 과거에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었음이, 조선학계까지도 포함되며, 작금이나 미래의 한국과 일본과의 경쟁이 경제에서만 점령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의 강점에 대한 염려가 고여 있는 것일 것이다. 필자 역시 후지츠카 치카시의 집요한 연구 자세와, 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에 의해 철저하게 탐구되어진 조선인 추사를 읽으면서, 더욱이 추사의 평생 배움의 삶의 족적을 연구하는 필자의 논문에 많은 부분을, 강점기 일본인 학자의 논문을 자료로 유용할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실태에, 유홍준과 같은 맥락의 느낌으로 心象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강점당한 일개의 조선의 학예인으로서, 동양철학의 제일인자로 조선문인들의 연구로 평생을 바친, 청나라의 경학과 고증학에 정통한 후지츠카로 하여금 “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라고 실토할 수 없게 한 추사의 山嵩海深의 학예의 경지에 후학으로서의 긍지와 절절한 존경을 표한다.
    또한 특이한 점은 이 논문의 머리말을 읽어보면, 후지츠카 치카시는 논문의 주인공인 추사 김정희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아니라 起承轉이 박제가와의 緣起이다. 결론에서 추사는 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로 짧게 조명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후지츠카는 유리창 서점에서 “朴修其 檢書를 만나 대번에 예전부터 서로 잘 알고 지냈던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라 한, 청나라의 진전의 글을 읽고 ‘조선의 朴修其’가 朴齊家와 異名一人임을 마음에 두고 이름을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있다가, 경성, 인사동 한남서림에서 발견한 [四家詩] 작은 시집에, “책머리에서 ‘박제가’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놀라고 기쁜 나머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자신의 박사청구 논문 머리말 서두에 박제가를, 말미에 추사를 연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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