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2)

clara jeon 2018. 10. 3. 17:10

왜, 후지츠카는 평생을 연구한 결과물 논문의 서두를 박제가로, 말미를 김정희로 연결하고 싶어 했을까. 후지츠카 치카시는 평생을 바친 조선문인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와 교류의 결과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淸朝學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완당평전],1, p.61)라고 확고한 자리매김으로 결론지었다. 그러하다면 후지츠카 치카시는 “조선이라는 특수한 사회에서 저주받은 운명 아래 태어난 불운아”([秋史 金正喜 硏究], 총설, p.62) 側室의 자식인, 서얼 박제가가 권문세가 사대부인 추사의 스승으로서 신분을 초월하여 지대한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을 確然하게 명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후지츠카의 논문에서 박제가를 언급한 글을 읽어보면 ‘박제가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놀라고 기쁜 나머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정도’의 그 마음을, “박평의 서자로 태어나 단지 그 자신 한 몸에 그치지 않고 저주받은 운명 아래 대대로 악영향을 끼치는 신분차별의 가혹한 제도에서 실로 가련한 삶이었으나 총명하고 영특한 자질로 격렬하게 학문을 연마한”([秋史 金正喜 硏究], 총설, p.62)라 한, 참담한 운명으로 인한 박제가의 불행한 삶에 동정과 격해지는 분노를 함께 느껴졌을, 후지츠카의 박제가를 향한 애련한 마음 씀을, 필자 역시 박제가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추스리기 힘들게 후지츠카 그 마음,  同病相憐 들어선다.
    일부 학자들은 박제가와 추사를 師弟間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각주: 대표적으로 金鉉權은 그의 박사논문 [김정희파의 한중회화 교류와 19세기 조선의 화단]에서, 추사가 초정 그리고 후손들과 추사가 직접적인 교유는 있었고, 연암을 비롯한 북학파 후손들의 일구어 놓은 학예상의 성과에 대해 비판과 수용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예술형성에 기초를 삼았음이 분명하나, 추사가 권돈인에게 보낸 서간 23신에서의 박제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박초정 같은 이도 간 곳마다 착오를 범하여....”를 인용하여 초정과 추사 사제간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근거라고 제시한다. 金鉉權, 같은 글 p,71-72) 실제로 초정이 추사를 언제 어디에서 몇 년 동안 무엇을 가르쳤다든가하는 정확한 기록이 全無할 뿐만 아니라, 秋史家와 楚亭의 인연 推移 역시, 1790년 추사의 養父인 김노영이 사은사로 연경에 갔을 때에 박제가가 동행했고, 김노영은 담헌 홍대용의 再堂姪婿로 연암 문하에서 종유하였다는 단편적인 기록뿐이다.([완당평전],1, p.41) 그 이유를 필자는 나름으로 다음과 같이 추이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차별제도에서 서얼 출신인 박제가가 왕가의 內戚, 권문세가인 경주김문 월성위가의 장손인 김정희의 스승이 될 수 있었겠느냐는, 설사 스승이었다 하여도 그 배움의 내용이나 그들의 사제간에 나눔을 신분 차별을 극복하고 세세히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었겠느냐와, 더구나 정조 死後, 박제가의 말년이 垂簾聽政 하던 정순왕후와 벽파의 수장 영의정 심환지를 비방한 윤행임의 凶書事件에 연루된 유배객이었고, 사망한 원인도 년대도, 불분명한 박제가의 당대의 寒微한 평가가 고위관직을 총망라하고 있었던 김노경의 권세에 미칠 波紋에 대한 문제로 기록이 부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추사의 청소년기에 이미 養父와 親父 모두 사은사로 청나라를 견문한, 선진적인 실사구시의 학문을 접하여 개안한 선각자였으므로 초정이 燕行 後, 낙후된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안으로 제시한 [北學議]를 탈고하였고, 더욱이 검서관으로 궁내에서 숙직할 때에 잠자는 초정에게 자신의 담요를 덮어줄 정도로 정조는 박제가를 격려하고, 정치. 경제 등의 획기적인 시정개혁안 상소로 중신들의 면박과 배제로부터 국왕의 철저한 비호를 받고 있었던, 북학파의 석학 초정을 추사의 스승으로 들이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