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의 스승과 學緣의 영향 - 朴齊家 (8)

clara jeon 2018. 10. 3. 19:15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의 신진문인들이 연경의 학예계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청의 고증학 등의 학풍을 조선으로 들여 올 수 있었던 것은 정조를 후견으로 하는 절대적인 비호에서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고 그 자료를 수집. 조사하는 檢書 자리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 비록 서출이지만 능력이 출중한 북학파 학자들을 채용, 학문의 연찬과 문화의 진흥을 위해, 조선과 중국을 망라한 모든 서적을 구입하여 “모든 게 다 있는 집” 皆有窩를 증축하는 등 신예학자들의 연구를 무한대로 지원했다.([완당평전]1, p.77) 新進四家 중에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검서관들의 연행도 전적으로 안목과 식견이 뛰어난 정조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는 능력 위주의 발탁이었다. 서출로서 조선사회에서 천민 등급으로 그 재능들이 坐視되었던 이들이, 정조의 聖恩에 보답하고자 심혈을 다한 열정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실로 이들의 연경에서의 행적은 견문 후의 저술들, 조선과 청의 학예문화, 정치, 경제 수준 등을 세세하게 관찰, 평가한 견문기인 박제가의 [北學議], 이덕무의 [入燕記], [盎葉記], [淸脾錄] 유득공의 [燕臺再遊錄] 등에서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견문 후, 전반적으로 낙후된 조선의 實況을 절감한 이들은, 청의 선진문물을 도입하고자 청의 명현들과의 교유를 연행 후에도 부단히 노력하였다. 특히 조선 성리학계의 폐단과 허점을 타파할 수 있는 신학문의 서적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空理空論을 벗어난 實事求是의 새로운 학풍, 실학을 탄생하는데 기여하였다. 실사구시의 학문이 새롭게 등장할 수 있도록 기운을 재촉한 첫 번째 공로는 마땅히 당시 연행한 여러 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秋史 金正喜 硏究], 총설, p.88),
    특히 박제가의 [북학의]는 고답적인 조선사회 전 분야에 충격을 주었다. [북학의]를 읽어가노라면 연암이 쓴 이 책의 서문 “박제가는 燕京에서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따져보면서, 눈으로 알 수 없으면 꼭 물어보고 마음으로 따져서 이상한 것은 반드시 배웠다고 한다.”라는 글이 자연스레 상기되어진다. [북학의]에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학문과 삶을 반드시 實得으로 실천하려는 實學的인 사상이, 실용을 위한 개선이, 실제적인 일상을 위한 구체적인 구상이 자세하다 못해 치밀한 계산과 계획으로 제시되어 있다. 후학들의 평가, “청조문화와 활발히 교류하여 청나라 학문과 예술의 신경향으로 고답적인 사상과 학문과 예술을 일변케 하는 기류를 형성하는 신사조를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박제가”([완당평전]1, p.79), “갑오경장 이전에 수십 명의 실학자가 배출되었으나 초정만큼 시대에 앞선 자주적이고 실천 가능성을 지닌 일상생활의 개선에 필요한 주장을 한 이는 찾아보기 힘든 특출한 인물”(정삼철, [[북학의]의 경제사상], p.155)로 인정함을 [북학의]를 읽으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다음 서간문에서는 초정의 지나친 慕華 성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데

저는 늘 우리 형이 성격이 특별하고 튀는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만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도리어 전혀 다른 중원의 풍습을 흠모하니 그 마음가짐이 얼마나 광활한 것 입니까. 만주의 鐵保나 玉保 등과는 형제처럼 지내고 西藏의 黃敎와 紅敎 등과는 학우처럼 지내는 등 세상에서 말하는 唐癖, 唐學, 唐漢, 唐魁 등의 이름이 모두 형에게 붙여져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인정하는 것이며 형께서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아정유고], 권7, <與朴在先齊家書>)

위의 글은 조선선비로서 나무랄 데 없는 인품과 의리와 절개를 갖춘 懋官이 초정에 대한 주변인들의 평을 걱정하며 박제가에게 충고한 편지이다. 실로 [북학의]를 읽다보면 박제가의 慕華思想이 唐癖, 唐魁 수준으로 조선의 실상을 條目條目 지적, 폄하하고 있어 이덕무 충고가 조선이나 청조 어느 쪽에도 경도되지 않는 냉철한 선배로서의 정당한 충고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