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제주도위리안치 (윤상도의 탄핵 상소)- 16

clara jeon 2018. 8. 20. 18:46

○壬辰/三司合啓以爲: "噫嘻! 痛矣。 賊度庚寅凶疏, 卽亘萬古所未有之劇逆大憝也, 而暗地授意者正喜也, 指使粧出者晟賊陽淳也。 其源流脈絡, 照應貫通, 奈其賦性悍毒, 一向抵賴, 敢謂證援之中斷, 期欲自作之掉脫者, 尤極痛惋。 大僚之箚, 蓋出於嚴獄體重法理之義。 我聖上欽恤審克之德, 孰不欽仰, 而渠是今獄之逆窩也, 罪首也, 不克窮覈, 遽爾酌處, 揆諸鞫體, 有漏網之憂, 論以邦憲, 有解紐之慮。 請大靜縣圍籬安置罪人正喜, 亟令王府, 更鞫得情, 夬正典刑。
" 批曰: "已諭於前箚之批矣。 勿煩。"

   1840년 헌종 6년 7월 10일, 안동김문 김홍근의 상소로 시작된 윤상도 옥사는 同年 9월 5일 헌종의 "전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에 일렀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已諭於前箚之批矣。 勿煩。"로 끝이 났다. 한 마디로 ‘윤상도 옥사’는 안동김문의 자작극으로 드러나 자파인 대사헌 김양순의 인명적 손실은 물론 정치적 권위도 실추되었고 본인들의 사주에 이용당했던 윤상도까지 죽여야 했지만 윤상도 입장에서 보면 안동김문에게 잘 보여 출세를 하려다가 되려 그들에게 배신당해 10여 년 동안 추자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능지처참으로 내몰리기까지 된 것이다.(안외순,<추사 김정희 가의 가화와 윤상도 옥사>,[추사연구]4호, p294, 각주 81)재인용)
    안외순의 주장에 필자의 소견을 披陳한다면, 안동김문은 반안동김문 중에 가장 유력성관인 왕가의 근친인 경주김문 죽이기, 추사가를 정계에서 축출하기 위하여 1830년 순조 30년 8월 27일, 부사과 김우명을 사주하여 경주김문의 수장 김노경을 탄핵상소하였고 그리고 바로 다음날 8월 28일 역시 부사과 윤상도를 사주하여 경주김문과 가까운 이들까지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모략으로 박종훈·신위·유상량을 탄핵상소하였다. 특히 末端職 副司果 尹尙慶는 이 탄핵상소건이 안동김문의 要人인 대사헌 김양순이 배후 조종자이므로 당연히 안동김문의 위세로 보아 앞날의 출세가 보장되리라 믿었을 것이다. 안동김문인 부사과 김우명은 안동김문의 보호막으로 승승장구의 출세줄을 이어갈 수 있었으나, 안동김문이 아닌 타성관 윤상도, 이 사건의 전말, 凶怪, 非理를 알고 있는 윤상도를 감싸줄 수 없었다.及其也 윤상도는 상소 직후 1830년, 순조로부터 본인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추자도로 유배 처분을 받았었다. 윤상도는 추자도에서 유배되어 십여 년을 귀양살이 하며 자신과 자신의 일족의 안위를 위하여 緘口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안동김문은 다시 추사가를 徹頭徹尾 逐出, 죽이기 위하여 윤상도 옥사를 재론하였다. 그러나 윤상도는 10년 전에 마무리 된 자신의 상소가 김홍근의 탄핵으로 재론되어 荒唐無稽하게도 다시 서울로 압송되자, 10여 년의 원악도에서의 귀양살이 抑憤, 그리고 事態의 趨勢로 보아 자신의 신변이 더 이상 안전할 수 없음을, 緘口해 보았자 안동김문의 보호를 받을 수 없음을 직감, 이 탄핵의 주동자 안동김문인 대사헌 김양순의 사주를 鞫問 중에 자백, 赤裸裸하게 사건의 진상을 실토한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진행이 자신들의 의도하고는 전혀 다르게 凶計가 드러나고 荒廢해지자, 안동김문 측에서는 자신들이 사주한 자작극임이 윤상도에 의해 드러나면 안동김문의 정치적 노선이 위태로워지니 윤상도를 국문 중에 大逆不道의 누명으로 戮屍處死하여 버렸다. 그리고 윤상도의 증언에 의해 김양순이 이 사건의 배후임이 확연해지자 안동김문은 김양순으로 하여금 荒唐無稽, 윤상도 옥사의 최종 사주자로 추사를 끌어들였으나 국문 중에 추사가 眞犯이 아님이 밝혀졌고 김양순 마져 죽고 오롯이 추사만 살아남아 힐문, 더이상 대질할 증인이 없었다. 추사 처단에 걸맞는 罪目이 없어 此日彼日 형벌의 대책이 없고, 안동김문의 위세 실추와 자파들의 인명손실, 자신들의 자작극임이 확연해지는 와중, 조인영의 차자로 추사는 減死되어 제주도 大精縣으로 圍籬安置되었다. 더욱이 안동김문은 이 옥사 국청 기간 동안에 추사가 뿐만 아니라 안동김문 외척세도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은 존립할 수 없도록 反安東金門 유력성관을 탄핵, 축출, 결국 안동김문은 인명손실, 위세 실추 등의 損亡失이 있었으나 윤상도 옥사를 계기로 더 이상의 정적이 없는 前代未聞의 一黨獨裁 안동김문 외척세도기를 그들의 각본대로 막강하게 구축하였다.
    추사가 옥사에 관련된 죄인들과 대질한 국청에 대한 모습이 민규호의 <阮堂金公小傳>에 언급되어 있는데 같은 책에서의 김녕한의 序 “그 강하고 모난 성품과 고고하고 개결한 행실”을 볼 수 있다. 추사는 국문 중에도 “행동거지가 평소와 똑같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