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추사 제주도위리안치 (윤상도의 탄핵 상소)- 13

clara jeon 2018. 8. 20. 18:18

그러나 김양순이 이 사건을 사주한 것으로 드러나자 안동김문으로서는 自繩自縛의 불리함을 벗어나야만 했다. 참으로 邪惡한 안동김문이었다. 김양순으로 하여금 국문 중에 *윤상도의 상소는 추사로부터 자신에게 전달된 것이라 하여 추사를 김양순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한 것이다. (*각주:당시 윤상도가 탄핵을 걸었던 박종훈·신위·유상량은 추사가와 친밀한 인사들로 박종훈(1773년,영조49 -1841년,헌종 7)은 평안도 관찰사. 대사성·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으로, 유상량(1764년,영조 40-?)은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 금위대장, 평안도 절도사로, 윤상도가 廢倫으로 지탄한 신위(1769년,영조 45-1845년,헌종 11)는 오히려 1818년에 춘천부사로 부임하였을 (승정원일기 2093책 (탈초본 108책) 순조 18년 3월 10일 정미 17/25 기사 1818년 嘉慶(淸/仁宗) 23년)그 시기에 춘천 지방의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 당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daum) 이들 박종훈·신위·유상량과 추사가의 공통점이란 안동김문의 勢道에 副應하지 않는 反안동김문 유력성관, 그리고 순조와 효명세자의 춘방요인으로 근친이라는 점, 더욱이 안동김문이 경계하는 유력성관 인물들 중 삼재를 갖춘 실력으로 김노경을 비롯하여 *평안도 관찰사 등의 요직을 재임하였다는 것이다. “翼宗四姦臣”으로 김노경과 엮어진 김로 역시 *平安道淸北暗行御史(순조실록 27권, 순조 24년 1월 6일 경오 1번째기사 1824년 청 도광(道光) 4년 암행 어사 김로가 서계...)였다.(각주: 필자는 김조순의 맏아들 김유근(1785,정조 9∼1840,헌종 6) 이 1827년 평안도관찰사로 除授되어 부임지로 가는 도중 황해도 서흥에서, 면회를 거절당한퇴임한 전직 德川郡 아전의 장씨의 앙심으로 가족이 모두 살해되고 김유근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 흉변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우연치 않은 평안도와 관련된 안동김문과 유력성관의 임직과 이직 연구 추리는 추사가의 가화의 裏面史의 한 가닥이지 않을까 사료한다. 김유근은 아버지 김조순의 사망한 뒤 군사의 실권을 잡아 판돈녕부사에 올랐으나, 중풍에 걸려 4년간 말을 못하는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김유근은 김조순을 이을 안동김문의 차세대 주자였으므로 추사와는 가문의 정치색으로 동반자가 될 수 없었으나, 추사와의 우정을 기린 (冬夜 爲秋史仁兄作) 神韻的인 <怪石圖>그릴 정도로, 그림의 쌍낙관으로 보아 추사와 황산의 우정은 돈독하였다. 그러나 추사가 윤상도 옥사로 고초를 당하고 있었을 때는 황산은 중풍으로 4년째 와병중, 더군다나 실어증으로 김조순의 아들임에도 추사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으며, 1840년 9월 4일 추사가 제주 위리안치 유배명령 전, 1840년 7월에 죽었다.)
    국문 중에 김양순이 윤상도의 배후 조종자로 추사에게 누명을 씌워 엮어들이자 예산 향저에 낙향해 있던 추사는 나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 모함은 김양순과 추사의 대질심문 중에서 김양순이 추사가 배후 조종자가 아니고 죽은 이화면이라고 번복하여 허위임이 白日下드러났지만, 모질고도 사악한 안동김문의 고위층에게 唆囑을 받았을 김양순도 사형 전에 죽어버렸다. 김양순은 국청의 고문으로 죽기 2년 전에 사헌부의 首長 대사헌으로 제수(헌종실록 5권, 헌종 4년 9월 7일 을사 2번째기사 1838년 청 도광(道光) 1838년 청 도광(道光) 18년, 김양순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다.以金陽淳爲司憲府大司憲)된 안동 김문으로서는 三司의 요인으로 이 윤상도 탄핵 상소의 예기치 않은 전개, 인재의 손실 등, 자신들 의도에서 완전히 빗나간 안동김문의 凶事가 되어버린, 極惡스럽게 추사가 죽이기의 이 일련 사건, 윤상도 옥사에 관련된 안동김문 謀利輩들은 모두 죽고 오롯이 혼자만 목숨 줄이 붙어있는 추사만이 국문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