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遇明, 김노경에 대한 탄핵, 고금도 유배>- 9

clara jeon 2018. 8. 14. 18:49

순조는 지금까지 상소의 내용이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또한 가공한 것도 아닐 터이나 안타깝지만 상황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즉 마지못해 이들을 유배, 삭직하나 한마디로 탄핵세력들이 안동김문을 믿고 자신들의 의도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런 정국을 이끌고 있다고 당시 안동김문에 의해 파행되고 있는 정황에 왕권의 한계를 자탄하며 안동김문과 일심동체가 되어버린 신료들을 힐난하였다. 허나 순조 역시 이미 안동김문으로 傾度되어버린 세도의 주체에 의존해야지만 그나마 存命, 治國을 할 수 있고, 안동 김문 또한 형식적으로 국왕의 재가가 있어야만 我田引水격으로 국사를 처리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유착관계에 의한 국정운영은 결국 悖行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안외순,<추사 김정희 가의 가화와 윤상도 옥사>,[추사연구]4호,p280) 안동김문의 주도면밀한 정략, 즉 자신들의 재집권을 막강하게 구축하여 다시는 효명세자대리청정기 시기에서의 정계에서의 도태, 즉 4년 여 간의 유배, 삭직 등 축출의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한, 그들을 제외한 유력성관 몰아내기, 김노경을 비롯한 “翼宗四姦臣” 몰아내기는 그들의 의향대로 성취되었다. 모든 인사권을 전횡하는 안동김문에게 협착하여 생존 할 수 밖에 없는 삼정승, 삼사,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조차도 안동김문의 농단과 독란에 유착하여 私利私慾에 눈이 멀어 흉측한 소굴, 안동김문의 간신들이 되어 나라와 민생을 도탄, 國運은 위태, 안동김문의 勢道는 亡國을 초래하는 발판이 되었다. 권위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실재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이 둔화, 허상을 믿게 만들고, 그들의 믿는 허구에 눈이 가려져 있어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한준상, 호모 에루디티오, 제5장 쿼터너리 하이퍼 성인교육,(5) 권위의 소유와 무소유 p255)
    이후 안동김문의 정적의 가문인 경주 김문은 이런 경위로 서서히 가문이 사위어 갔다. 김노경은 64세의 노구로 절도 고금도에 위리안치되었고, 추사는 더 이상 관직에 재직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정계에서 물러나 부친의 귀양살이의 서글픔을 학예연찬으로 달래며, 연경학계와 끊임없이 교류하였다. 그리고 고금도에 부친을 찾아뵈어 한동안 모시기도 하였는데 그 기록이 장동 본가의 아내에게 보낸 諺簡에 남아있다.

지난번 인편에 받은 글월 든든하오며 겨울날이지만 아직 덥사오니 요사이 연하여 한 가지로 지내오는지 걱정이 끝이 없사오며 호동 이참판 형님의 상사는 슬프고 또 슬프니 어찌 다 적사오며 누님의 정경 더욱 붓을 들어 일컫사올 길이 없습니다. .....
상하가는 다 무사히들 지내고 창녕댁은 들어왔습니까. 아이들도 잘 있습니까. 갑자기 도져서 앓는다 하더니 즉시 나았는지 동동합니다.......
교관은 오늘 떠나옵고 나는 생신이나 지내고 올라갈까 하였으나 21일 하반 미쳐 올라가려 하니 일시 모시고 있는 이가 없게 되었으니 정리의 정으로는 어려운 일이나 올라가기로 정하여 12일간 떠나 18일간 들어가게 되겠습니다.
토씨는 교직 한 필 짧게 보내오니 잘 받으십시오. 수이 곧 가겠사오니 총총 이만 적습니다.
11월 초아흐레 상장.

문인 민규호가 [완당전집] <완당김공소전>에서 “공은 효성스럽고 우애하였으며”라 하였듯이, 경주 김문의 종손으로서 추사는 가문의 가화에도 연경학계와 교류하면서 학예를 연마하면서 효심이 지극한 진중한 모습으로 종가를 이끌며, 부친이 억울한 귀양살이에서 속히 풀려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마 다방면으로 부친 解配를 위해 魂神의 노력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월성위가 가문의 막중한 대들보 嫡長孫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이 1년이 지나도록 해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1832년 2월 26일 순조의 행차길에 양반 사대부가로서는 좀처럼 행하기 힘든 擊錚으로 직접 호소하였다. 다음은 條目條目 증거를 제시한, 혼신의 간청을 담은 추사의 訟寃文으로 전문을 수록한다.

순조실록 32권, 순조 32년 2월 26일 계묘 2번째기사 1832년 청 도광(道光) 12년
의금부에서 김정희의 격쟁에 대해 원정을 물시하기를 청하니 윤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