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遇明, 김노경에 대한 탄핵, 고금도 유배>- 11

clara jeon 2018. 8. 14. 18:55

則渠父答曰, ‘睿齡鼎盛, 代摠庶政, 克體我大朝付托之聖意, 如吾輩少須臾無死, 獲覩盛擧不勝欣忭。’ 所言止此。 至於數十年抑情仕宦云, 初無語脈之彷彿矣。 渠之從兄敎喜, 自寧邊任所遞歸, 忽聞浮說之流行, 逢着金鏴於公座, 迫問其時酬酢之如何, 則鏴之所答, 卽與渠父之言, 無一差爽。 鏴今生存, 焉敢誣也? 而己卯凶言事, 尤萬萬虛謊冤痛矣。 渠父果有此凶言, 則言之必有其處, 聞之必有其人, 此果何等關係, 而孰肯掩護, 乃於十餘年之後, 始爲發露乎? 且平日藉手而事君者, 卽惟在於嚴忠逆一節, 至於裕賊之匈圖逆節, 爲今日臣子, 人孰不沫血致討? 而渠父於此義理, 秉執尤嚴, 乃於垂死之年, 自非喪心失性, 則何敢倡爲凶言, 甘與裕賊而同歸乎? 似此至冤抑至痛迫之狀, 庶可畢燭。 餘外許多臚列, 無非搆虛捏空, 而比諸上項所陳兩條, 猶屬緩聲, 苟欲張皇條辨, 徒增煩瀆矣。 渠爲人子, 見其父抱此惡名, 急於爲父訟冤, 有此冒萬死訴冤。’ 云矣。 臺啓方張, 罪案至重, 請原情勿施。" 允之。

추사는 이 송원문에서 사건 당일의 김로와 김노경의 대화의 진의를 증거로 제시, 세심하게 토로하고 있다. “대리 청정(代理聽政)하게 된 이후로 소조(小朝)께서 온갖 중요한 정무(政務)를 대신하여 다스리고 모든 정사(政事)를 몸소 장악하셨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저의 아비가 대답하기를, 「예령(睿齡)이 한창이신 이때 여러 가지 정사를 대신 총괄하시어 능히 우리 대조(大朝)께서 부탁하신 성의(聖意)를 몸받으셨으니, 나같은 보잘것없는 무리도 잠시 죽지 않고서 성대한 일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다.‘代聽以來自小朝攝理萬機, 躬攬庶政, 豈不盛矣云?’ 則渠父答曰, ‘睿齡鼎盛, 代摠庶政, 克體我大朝付托之聖意, 如吾輩少須臾無死, 獲覩盛擧不勝欣忭” 이 대화의 속내를 풀이하자면, 효명세자 소조께서 대조인 순조를 대신하여 모든 정사를 능히 처리하고 계시니, 효명세자의 일 솜씨가 정당함에 측근신료들인 우리는 전날들의 안동김문 세도기에서 용케 살아남아 지금 함께 성은을 입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안동김문의 입장에서 들으면 자신들의 농단과 독란의 패행에 대한 비난이며, 안동김문의 정치적 입지가 장차 이들, 세자 측근에 의해 능히 제거 당할 우려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안동김문은 정국의 변화되는 적절한 시점에서 이들의 대화를 왜곡하여 김우명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반격을 시도하게 한 것이다. 추사는 이 사건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시비명변을 하고 있다. “저의 종형 김교희(金敎喜)는 영변(寧邊)의 임소(任所)에서 체직되어 돌아와 갑자기 뜬소문이 유행하는 것을 듣고는 김로를 공좌(公座)에서 만나 그때에 수작한 것이 어떠했는지를 다그쳐 물었는데, 김로의 대답한 바는 곧 저의 아비의 말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김로가 지금 살아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渠之從兄敎喜, 自寧邊任所遞歸, 忽聞浮說之流行, 逢着金鏴於公座, 迫問其時酬酢之如何, 則鏴之所答, 卽與渠父之言, 無一差爽。 鏴今生存, 焉敢誣也?” 그리고 이어 추사는 순조도 傳說의 발계임을 인지하여 불윤한 기묘년 사건을 “...기묘년 흉언(凶言)의 사건은 더욱 매우 허황하고 원통하였습니다. 저의 아비가 과연 이러한 흉언이 있었다면 말했던 장소가 반드시 있을 것이고 들었던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 일이 과연 어떠한 관계인데, 누가 즐겨 엄호(掩護)하다가 1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드러내겠습니까?...而己卯凶言事, 尤萬萬虛謊冤痛矣。 渠父果有此凶言, 則言之必有其處, 聞之必有其人, 此果何等關係, 而孰肯掩護, 乃於十餘年之後, 始爲發露乎?”라 하며 들은 자도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 풍문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는 부친의 원통함을 호소하며 순조의 거동 길에 격쟁과 송원하였다. 그러나 사대부 명가의 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임금의 행차길에 꽹과리를 치며, 오로지 부친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시고 고금도의 귀양살이를 풀어주십사한 추사의 격쟁을, 순조는 왕의 신료가 아니라 안동김문의 신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판에서 王權이 稀釋, 消失, 추사의 訟寃을 들어줄 威權이 없었다. 그런다고 효심 지극한 추사가 가만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추사는 첫번 째 격쟁에 效驗이 없자 다시 6개월 후에 격쟁을 한다. 그러나 순조는 이번에도 안동김문의 파벌 위세에 압도, 추사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고 단지 그 發意에 벌주지 말라라고만 하였다. ○ 鄭知容, 以義禁府言啓曰, 擊錚罪人捧供後卽爲放送, 曾有先朝受敎矣。 金正喜旣已捧供, 卽爲放送之意, 敢啓。 傳曰, 知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