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金遇明, 김노경에 대한 탄핵, 고금도 유배>- 10

clara jeon 2018. 8. 14. 18:50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 승지 김정희(金正喜)는 그의 아비 김노경(金魯敬)에 대한 송원(訟寃)의 일로써 격쟁(擊錚)하였는데, 그 원정(原情)을 가져다 본즉 이르기를, ‘저의 아비 김노경은 재작년에 김우명(金遇明)에게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미어 무함하는 추악한 욕설을 참혹하게 당하였었고 이어서 사실이 없는 두 죄안(罪案)이 갑자기 대론(臺論)에 들게 되었으니, 이렇게 죄를 성토당함이 지극히 무거운 처지로서 어떻게 온전히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마는, 삼가 우리 전하(殿下)께는 내리신 큰 은택이 융성하고 두터워 처분하시던 날에 사교(辭敎)가 저의 증조모에게까지 미쳐 특별히 대대로 유죄(宥罪)하는 은전(恩典)에 따라서 거듭 간곡히 보호하는 은택을 내리셨습니다. 더군다나 성교(聖敎) 가운데의 양초(梁楚)라는 한 귀절에는 깊으신 속마음을 기연(其然)미연(未然)하는 사이에 두셨음을 더욱 우러러 알 수 있으니, 저의 온 가족이 비록 몸이 부스러져 가루가 되더라도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저의 증조모의 어둡지 않은 정령(精靈)께서도 또한 앞으로 감읍(感泣)하실 것입니다. 그가 이른바 감정을 억제하고 사환(仕宦)했다는 말은 일찍이 정해년 여름 사이에 저의 아비가 인척(姻戚) 집 연회의 자리에 갔었는데, 남해현(南海縣)에 안치(安置)했던 죄인 김로(金鏴)가 마침 그 좌석에 있다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저의 아비를 향하여 말하기를, 「대리 청정(代理聽政)하게 된 이후로 소조(小朝)께서 온갖 중요한 정무(政務)를 대신하여 다스리고 모든 정사(政事)를 몸소 장악하셨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저의 아비가 대답하기를, 「예령(睿齡)이 한창이신 이때 여러 가지 정사를 대신 총괄하시어 능히 우리 대조(大朝)께서 부탁하신 성의(聖意)를 몸받으셨으니, 나같은 보잘것없는 무리도 잠시 죽지 않고서 성대한 일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말한 것이 여기에 그쳤는데, 수십 년 동안 감정을 억제하면서 사환했다는 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어맥(語脈)이 비슷한 것도 없습니다. 저의 종형 김교희(金敎喜)는 영변(寧邊)의 임소(任所)에서 체직되어 돌아와 갑자기 뜬소문이 유행하는 것을 듣고는 김로를 공좌(公座)에서 만나 그때에 수작한 것이 어떠했는지를 다그쳐 물었는데, 김로의 대답한 바는 곧 저의 아비의 말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김로가 지금 살아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그런데 기묘년 흉언(凶言)의 사건은 더욱 매우 허황하고 원통하였습니다. 저의 아비가 과연 이러한 흉언이 있었다면 말했던 장소가 반드시 있을 것이고 들었던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 일이 과연 어떠한 관계인데, 누가 즐겨 엄호(掩護)하다가 1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드러내겠습니까? 또 평일에 의거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은 곧 오직 충신과 역적의 구분을 엄히 하는 한 절목에 있는데, 역적 권유(權裕)의 흉측한 계획과 역모의 정상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신자(臣子)된 사람으로 누가 피눈물을 부리며 주토(誅討)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아비는 이 의리에 있어 굳게 지키기를 더욱 엄하게 하였으니, 거의 죽게 된 나이에 스스로 심성(心性)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감히 흉언을 창도해 내어 역적 권유와 더불어 한데 돌아가기를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이와 같이 지극히 억울하고 지극히 통박(痛迫)한 상황을 다 통촉하실 것입니다. 나머지 허다하게 나열한 것은 터무니없는 일을 날조한 것이어서 상항(上項)에 진달한 두 조목에 비교하면 오히려 누그러진 소리에 속하였으니, 진실로 장황하게 조목별로 변명하려면 다만 번독(煩瀆)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사람의 자식이 되어 아비가 이러한 악명(惡名)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아비를 위해 송원(訟寃)하기에 급하여 이렇게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원통함을 호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계(臺啓)가 바야흐로 벌어져 죄안(罪案)이 지극히 무거우니, 청컨대 원정(原情)을 물시(勿施)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하였다.

○義禁府啓言: "前承旨金正喜, 以其父魯敬訟冤事擊錚, 而取見其原情, 則以爲 ‘渠父魯敬, 再昨年慘被金遇明構誣醜辱, 繼以白地兩案, 忽入臺論, 以若聲罪之至重, 何望生全, 而伏蒙我殿下洪恩隆渥, 處分之日, 辭敎至及於渠之曾祖母, 特從世宥之典, 重垂曲保之澤。 況聖敎中, 梁楚一句, 淵哀之置諸然疑, 尤可仰認矣, 渠之闔門, 雖卽糜身, 何以報答? 而渠之曾祖母不昧之精爽, 亦將感泣。 其所謂抑情仕宦之說, 曾在丁亥夏間, 渠父往赴姻戚家宴席, 南海縣安置罪人金鏴, 適在座, 語次間向渠父而曰, ‘代聽以來自小朝攝理萬機, 躬攬庶政, 豈不盛矣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