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출세(6)

clara jeon 2018. 7. 6. 22:43

   규장각은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首建하였다”라는 취지로 설각 하였다. 정조가 우선시 한 초기 규장각 기능은 외척들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견제, 정조의 意志를 실현할 수 있도록 왕권 수호, 안정 등 왕권 강화 역할이었으므로 규장각의 2대 명분인 右文之治와 作人之化 역시, 정조의 이상 정치 실현 指標로 왕권기반을 다지기 위한 명문화된 정치적 표방이었다. 왕권이 안정되어 규장각이 정조대에 어느 기구보다도 정치적, 문화적인 비중이 확대되자, 학문의 진작을 위한 右文政治, 繼志術史, 崇儒中道의 학술 문화적 기능이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의 기능을 흡수하여 과거시험 제도와 抄啓文臣 제도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 제도들로 양성된 학자들은 정조의 近侍로 문예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 강화를 뒷받침하였다. 원래 ‘규장’이란 왕의 御筆과 御製 뜻으로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親筆·書畵·顧命·遺敎·璿譜등을 관리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정조대에는 정치적 혁신 선도 기구로서의 존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교를 진흥시키고 타락한 당시의 풍습을 순화시키기도 하였다. 더욱이 사대부들의 정치적인 득실의 한계를 벗어나 백성들의 疾苦 등 일상의 삶을 보살피기도 하는 민생구호대책기관, 즉 정조에게로의 民意 上達, 言路의 直結通路의 역할로 民本的인 理想政治 실현, 民生의 문제를 百事如意로 처리할 수 있는 왕의 近侍기관이었다. 그러나 정조 死後 규장각의 기능은 차츰 왕실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특히 추사가 보임하던 순조대의 규장각은 안동김문과 경주김문의 세도정치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어 정조대의 찬란하게 꽃피웠던 문예부흥이 점차 퇴조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규장각 閣臣은 제학 2인 직제학 2인 직각 1인 대교 1인 외에 검서관 4인으로 구성된다. 추사가 임직한 대교는 정9품에서 정7품의 품계로 翰圈, 注蔫, 設書, 通望人으로 추천된 인물 중에서 本閣이 圈點하여 吏曹에서 임명하였다.([규장각의 도서편찬 간인 유통에 관한 연구], 15p) 규장각의 각신은 어제집, 어정서, 왕후 전기집, 일반서 등 도서 편찬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이들에게는 國政議論, 王命出納, 人事權, 製述權의 권한이 있었으며, 編修, 記主, 記事官을 겸직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추사연구]2,p279)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없는 특이 사항이 있는데 추사가 “사간원, 사헌부의 여러 벼슬을 거쳤는데 항상 지제교 임무를 수행하였다”란 기록이 있는데 “知製敎”란 임금의 말씀을 문서로 작성하는 임무로, 문장 驅使, 構思능력이 특출하여 과거시험 문과 제술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추사가 編修, 記主 記事官 특권, 製述權으로 지제교의 임무를 담당하였다고 추정 된다.

6.순조 23년 3월 11일

순조실록 26권, 순조 23년 3월 11일 경진 2번째 기사 1823년 청 도광(道光) 3년

규장각의 권점을 행하다

규장각(奎章閣)의 권점(圈點)을 행하였다. 【검교 제학 김조순(金祖淳), 검교 직제학 이존수(李存秀), 직제학 이용수(李龍秀), 검교 직각 정기선(鄭基善), 검교 대교 이학수(李鶴秀)이다.】 직각 4점(點)에는 박영원(朴永元)·조인영(趙寅永)·이약우(李若愚)이고, 대교 4점에는 이헌위(李憲瑋)·김정희(金正喜)였다. 홍석주(洪奭周)·조종영(趙鍾永)을 규장각 직제학으로, 박영원(朴永元)을 직각으로, 이헌위(李憲瑋)를 대교로 삼았다.
行閣圈。 【檢校提學金祖淳, 檢校直提學李存秀, 直提學李龍秀, 檢校直閣鄭基善, 檢校待敎李鶴秀。】 直閣四點, 朴永元、趙寅永、李若愚, 待敎四點, 李憲瑋、金正喜, 以洪奭周、趙鐘永爲奎章閣直提學, 朴永元爲直閣, 李憲瑋爲待敎。

7, 순조 23년 8월 5일

순조실록 26권, 순조 23년 8월 5일 신축 1번째 기사 1823년 청 도광(道光) 3년

김정희를 규장각 대교로 삼다

김정희(金正喜)를 규장각 대교로 삼았는데, 전망(前望)에 의해서이다.
辛丑/以金正喜爲奎章閣待敎, 前望也。


다음은 추사가 규장각의 대교로 3여 년을 임직한 후, 1826년 순조 26년 암행어사의 보직으로 충청우도를 시찰한 후 상벌을 시행하기 위한 書啓를 올린 기록이다.



'秋史 사랑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세(8)  (0) 2018.07.06
출세(7)  (0) 2018.07.06
출세(5)  (0) 2018.07.06
출세(4)   (0) 2018.07.06
출세(3)   (0) 2018.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