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출세(3)

clara jeon 2018. 7. 6. 18:06

[조선왕조실록]의 김한신의 졸기를 보면

영조실록 91권, 영조 34년 1월 4일 신묘 3번째 기사 1758년 청 건륭(乾隆) 23년

월성위 김한신의 졸기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졸(卒)하였다. 조정에서 받들어 위로하고, 정후(庭候)하였다. 하교하기를,

"월성위 김한신(金漢藎)은 최초의 도위(都尉)로 염아(恬雅)하고 근칙(謹飭)하여 마음으로 항상 이를 아름답게 여겼는데, 어찌 한 병으로 의약의 효험이 없을 것을 뜻하였겠는가? 갑자기 이 소식을 들으니, 슬픔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무릇 여러 가지 일은 일체 해창위(海昌尉)의 예(例)에 의하여 거행하고, 장생전(長生殿) 퇴건(退件)의 구재(柩材)를 골라서 보내며, 3년을 기한하여 월름(月廩)을 그대로 주고, 시호(諡號) 의정(議定)은 성복(成服)을 지난 뒤에 곧 거행하라."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한신은 고(故) 상신 김흥경(金興慶)의 아들로서 천가(天家)에 빈생(賓甥)이 되었는데, 부귀로 생장하였으나 분화(芬華)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의복이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출입에 초거(軺車)를 타지 아니하고 항상 말을 타며 많은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다니니, 가로(街路)의 사람들이 간혹 도위가 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 성품이 효우(孝友)하고 공근(恭謹)하여 교만하고 귀한 뜻이 절대로 없으며, 노예를 엄하게 단속하여 여리(閭里)에 횡포하고 방자함이 없도록 하였다. 위로는 진신(搢紳)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대(輿儓)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아름다움을 일컬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였다. 임금이 슬퍼함을 그치지 아니하고, 비봉(庀賵)을 모두 우대하는 법으로 썼다. 아는 이나 모르는 이가 모두 말하기를, ‘어진 도위가 죽었다.’고 하였다."
시호를 정효(貞孝)라 하였다.
月城尉 金漢藎卒。 朝廷奉慰庭候。 敎曰: "月城尉 金漢藎, 以最初都尉, 恬雅謹飭, 心常嘉之, 豈意一?, 醫藥罔效? 遽聞此報, 愴悼曷喩? 凡諸等事, 一依海昌尉例擧行, 長生殿退件柩材擇送, 限三年仍給月廩, 議諡, 過成服後, 卽爲擧行。"
【史臣曰: 漢藎以故相興慶之子, 賓甥天家, 生長富貴, 而不喜芬華, 被服如寒士, 出入不乘軺車, 常騎款叚, 屛徒而行, 街路之人, 或不知爲都尉。 性孝友恭謹, 絶無驕貴意, 嚴戢僕隷, 無得橫恣閭里。 上自搢紳下至輿儓, 莫不稱其美, 至是病卒。 上嗟悼不已, 庀賵皆用優典。 知與不知, 皆曰賢都尉亡矣。 諡曰貞孝。】

위의 글에서 김한신의 품행은 허물이나 결함이 없어 흠잡고 나무랄 데가 없는 조선 선비의 모법적인 삶을 산 어진 이로, 왕조 卒記에 이처럼 극찬의 긍정적인 평을 받은 이는 드물 것이다. “여대(輿儓)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아름다움을 일컬어진”, 월성위의 종손이 추사였으니, 순조가 내린 “月城尉祀孫, 今已登科, 實爲喜幸。 貴主內外廟, 遣承旨致祭” 致祭의 謝恩을 내리고도 賜樂내린 순조의 “實爲喜幸”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더욱이 추사에게 이런 過讚의 사은을 내린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을 때 수렴청정을 한 영조의 계비, 貞純王后는 추사의 11촌 대고모이었다. 순조는 월성위의 종손인 추사의 급제를 왕가의 위용을 세운 영광으로 임금이 신하에게 음악을 내려주는 사은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內戚 명문으로 경주 김문을 확고하게 자리매김 한 김한신은 불과 39세에 후사도 없이 안타깝게 요절하였다. 월성위가 소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 金頤柱(1730~1797)를 양자로 맞아 家系를 이어가게 하는데, 이가 바로 추사의 할아버지이다. 영조는 외손자인 김이주를 총애, 비호하여 승지. 광주 부윤. 대사헌. 형조판서 등의 높은 벼슬을 주어 출세를 거듭하게 하였다. 더구나 김이주의 아들, 魯永. 魯成. 魯明. 魯敬은 수원판관,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임하여 집안을 안팎으로 번창 하게 하였다. 이들 중 장남인 노영이 후사가 없어 추사는 여덟 살 무렵, 백부의 系子로 出系하여 嗣孫으로 月城尉家의 종손이 되었다. 추사의 양부와 생부인 이들은 모두 大科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하였고, 특히 추사의 생부는 末子 노경으로 후에 이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관료의 요직을 두루 임직하여, 추사는 학문과 권세가 드높은 출신 배경으로 귀공자로서 典雅한 학예를 다질 수 있었다.
    다음은 왕의 특별한 사은을 입은 과거급제 후, 월성위 김한신을 中樞로 왕가의 內戚으로 입지한 權門勢道家인 경주 김문의 배경으로 승진하는 [조선왕조의 실록]에서의 추사의 出世街道 기록이다.


'秋史 사랑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세(5)  (0) 2018.07.06
출세(4)   (0) 2018.07.06
출세(2)  (0) 2018.07.06
추사의 평생배움 형성 과정-出世(1)  (0) 2018.07.06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13  (0) 2018.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