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출세(5)

clara jeon 2018. 7. 6. 22:41

위와 같이 왕이나 세도가들의 권력에 굴하지 않는 春秋筆法의 이들 한림 사관들을 송나라 증공은 “그 명철함이 만사의 이치를 반드시 족히 두루 알아야 하고 도의는 반드시 족히 천하의 용도에 정당해야 하며, 지혜는 족히 알기 어려운 의미를 통해야 하고 文詞는 드러나기 어려운 정서를 발해야만 사관의 소임을 칭송할 수 있다”([조선시대의 사관 정신연구],10p) 라고 그 자격 요건을 嚴正하게 제시하였다.
    다음은 추사가 1820년 순조 20년 10월 17일, 우수한 성적으로 입격한 과거급제, 권문세가의 자제, 三長之才의 한림 요건을 구비한 인재로 都堂會圈에서 6점 投点을 받아 사관 관직에 입문, 검열 후보자가 되고, 후보자 중 적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詩. 賦. 論. 策文 등 翰林召試에서 합격, 이어 2년 후 1822, 순조 22년 6월 18일 한림 검열관으로 보직한 기록들이다.

4. 순조 22년 6월 18일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6월 18일 경신 1번째 기사 1822년 청 도광(道光) 2년

한림 권점을 하다

한림 권점을 하였다. 【별겸춘추(別兼春秋) 김도희(金道喜)·박영원(朴永元)·검열 김정희(金正喜)이다.】 3점에 장교근(張敎根)·이헌위(李憲瑋)·김병조(金炳朝)·조용화(趙容和)이었다.
庚申/行翰圈。 【別兼春秋金道喜, 朴永元, 檢閱金正喜。】 三點, 張敎根、李憲瑋、金炳朝、趙容和。

    다음은 추사가 1820년 순조 20년부터 1822, 순조 22년 6월 18일 예문관 한림으로 임직한 후 규장각으로 보직을 옮긴 기록이다. 추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에는

“기품이 훤칠하고 기상이 온화하여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모두를 즐겁게 했으나 義나 利 분변함에 이르러서는 번개와 칼끝으로 가르듯 의논이 분명하여 감히 막아선 자가 없었다.”라고 추사의 성품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이어 “그러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속박을 벗어버리고 학문에 전념한 것은 하늘이 선생을 후하게 대한 것이다. 몸은 막혀도 도가 트이고 한 시대에 굽혀도 긴 역사 속에 펼친다면 유감이 없다 할 수 있을 것이다.”(<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추사연구]2, p279)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은 추사가 한림 검열관의 보직을 오래도록 임직하게 할 수 없게 한 연유, 그 추정으로 인용한 구절이다. 사관이란 직책의 특성 以實直書, 추사의 강직한 성격으로 조선 후기 안동 김문의 濁流의 勢道정치 권세 속에서 義와 利를 분변할 수 있는 직필을 추사가 구사할 수 있었겠느냐의 의구심, 즉 감히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는 議論이 분명한 추사의 성품이 사관 정신만으로는 그 시대의 不義를 감내하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추사는 규장각 권점에서 4점을 받아 대교로 임명된다. 특히 1823년 대교직으로 임명되는 아래의 기록에서 “김정희를 규장각 대교로 삼다. 金正喜를 규장각 대교로 삼았는데, 前望에 의해서이다(辛丑/以金正喜爲奎章閣待敎, 前望也). “前望也”의 의미는 추사의 학문적인 탐구심과 好學을 관찰한 통찰력있는 本閣들의 판정과 사관의 직필, 즉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속박을 벗어버리고 학문에 전념”할 것이라는 前望 의미가 가미되어졌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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