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출세(2)

clara jeon 2018. 7. 6. 18:01

[완당전집]에는 “신의 집을 멸족 시키려는 마음에 의해서 가혹한 무함이 신의 아비에게 먼저 미친 것이고 보면....”중략 ([완당전집]1,<辭職兼陳情疏>, p105) 등의, 경주 김문, 왕가의 內戚 月城尉家의 宗孫으로서 위태로움에 처한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는 추사의 처연하도록 애달픈 삶의 편린들을 상소문에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一日, 세밀히 기록한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조선왕조실록]의 추사가 임직한 보직을 순차적으로 기술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추사의 기록으로 최초의 등재는 문과 과거시험 다섯 번째 단계인 殿試에 대한 언급으로 전문은 다음과 같다.

1. 순조 19년 1월 23일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1월 23일 병진 1번째 기사 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춘도기 유생 시험을 시행하다.

춘도기 유생(春到記儒生)의 시험을 숭정전(崇政殿)에서 시행하였다. 강경(講經)에서 수석을 차지한 이병귀(李秉龜)와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김정희(金正喜)에게 모두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가게 하였다.

丙辰/試春到記儒生于崇政殿, 講居首李秉龜, 製居首金正喜, 幷直赴殿試。

*각주: 당시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을 대상으로 각종 시험을 실시하였고, 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文科의 초시나 회시를 면제해 주거나 문과 초시에 응시할 때 가산점을 주었다.(이상무, [인조-숙종대 별시 운영과 성균관 교육 연구],P.153, 서울대학교 대학원,2015)

이미 생원 교지에서 1등으로 입격하여 우수한 학업 실력을 엿볼 수 있듯이 추사는 성균관 유생시절에도 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殿試에 곧바로 나가는(丙辰/試春到記儒生于崇政殿, 講居首李秉龜, 製居首金正喜, 幷直赴殿試)등, [조선왕조실록] 졸기에 기록 된 ‘聰明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聰明强記, 博洽群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양민과 양반들의 立身揚名를 위한 人才登龍門이다. 양민이 과거에 합격하여 官職에 임용된 경우는 稀少해 응시률이 저조하였으나, 사대부로서의 權門勢族의 가문을 이어가야하는 양반들은 權門의 揚名를 위해 관직의 임용제도인 과거를 중시, 합격을 위한 교육에 집착하여 열중 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왕조는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를 답습하여 전례대로 정기적으로 문과 · 무과 · 잡과를 분류하여 실시하였다. 그러나 유교를 國是로 한 조선왕조는 文을 숭상하여 四書五經에 중점을 둔 생원시, 진사시 즉 司馬試를 중시하여 사대부들은 문과에 편중하였다. 또한 문과시험에서의 우수한 성적은 주요 補職과 연관이 있어, 과거시험이라 하면 사대부들 간에는 당연히 문과로의 진로로 단정할 정도였다. 추사가 성균관 儒生 시절에 수석을 차지한 제술 역시 시. 부 송. 시무책이 주요 시험과목으로 당시 중시했던 경학과 문학 議題에 필기로 답하는 일종의 논술로 문과적인 소양의 깊이를 가늠하는 시험이었다.

문과의 시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소과 초시 初試 소과 1차 시험

2 복시 複試 소과 최종 시험

  성균관 입학 (생원, 진사)

3 대과 초시 初試 대과 1차 시험

4 복시 複試 대과 2차 시험

5 전시 殿試 대과 최종 시험

위의 기록에서의 ‘製居首金正喜, 幷直赴殿試’는 추사가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즉 直赴를 의미한다. 직부에는 直赴會試와 直赴殿試가 있는데 직부회시는 초시를 면제 받고 바로 회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직부전시는 회시까지도 면제 받아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으므로 문과에 급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2개월 마다 殿講에 응시하여 純通을 받으면 직부회시를 주는데 왕이 親臨하여 직부전시를 주기도 하였다. 위의 병진 1819년 순조 19년 1월 23일의 기사는 추사가 제술, 즉 문학적인 논술시험에서 수석을 하여 회시까지 면제를 받아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습득하였다는 기록이다. 이 이후 추사는 순조 19년 윤4월 1일 과거에 등과하여 왕가의 친족, 月城尉의 奉祀孫으로 賜樂, 致祭 謝恩을 받은 영예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2.순조 19년 윤4월 1일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 윤4월 1일 임진 1번째 기사 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문·무과의 사은을 받다

흥정당(興政堂)에 나가서 문·무과의 사은(謝恩)을 받고, 새로 급제한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악(賜樂)하라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월성위(月城尉)의 봉사손이 지금 등과하였으니, 실로 기쁘고 다행스럽다. 귀주(貴主)의 내외묘(內外廟)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壬辰朔/御興政堂, 受文武科謝恩命, 新及第金正喜賜樂, 仍敎曰: "月城尉祀孫, 今已登科, 實爲喜幸。 貴主內外廟, 遣承旨致祭。

    다음 서술은 위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충하기 위한 月城尉의 삶을 부각한 논지이다. 월성위 金漢藎은 추사의 曾祖父로 경주 김문이 왕실의 內戚 명문으로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게 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재로 경주 김씨 가문의 權門勢族을 구축하였고, 더욱이 추사의 立身揚名의 길에도 김한신의 후광은 막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둘째딸인 和順翁主와 영조 8년 11월 29일 임자, 1732년 결혼하여 月城尉로 봉해졌다. 인물이 준수하고 聰明剛起하였으며 글씨를 잘 써서 諡冊文도 많이 썼고 전각도 잘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 사위를

寵愛, 庇護하여 五衛都摠府, 都摠管, 濟用監, 提調 등의 요직에 봉하였을 뿐 만 아니라, 서울 통의동 월성위궁과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일대를 賜田으로 하사하고, 충청도 53개 郡縣에서 각 고을마다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시키어 53칸짜리 월성위 집안 향저를 짓게 하였는데, 이 집이 오늘날 예산 추사고택이다. 그러나 왕가에서 이처럼 보기 드문 推仰을 받던 월성위는 불과 39세 요절하여 사위를 잃은 영조를 비통하게 하였다. 더군다나 남편을 잃은 화순옹주는 열흘을 굶어 죽어 조선왕조 400년 동안 최초의 열녀의 길을 택했으니, 월성위 김한신은 순조 대에 까지 膾炙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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