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13

clara jeon 2018. 6. 21. 19:42

연경에서의 감회를 마무리한 이 송별시에는 추사의 웅지의 꿈이 야물지게 함의되어 있어 의미심장하다. 추사는 “九夷에서 태어난 나는 참으로 촌스러워, 중원의 선비들과 사귀는 것이 참 부끄럽다”하였다. 自愧스런 추사의 촌스러운 부끄러움, 그러나 추사의 山崇深海의 웅지가 단지 촌스럽게 부끄럽게 “땅 모서리 하늘 끝 방 안에”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대는 푸른 바다 고래 끄는 솜씨라면, 나는 신령한 마음을 갖고” 조선에 돌아와, “龍腦는 모름지기 공작꼬리 끌어오고, 비파는 蕤賓의 철과 호응한다”에서 예견되었듯이, 청조학예의 핵심을 꿰뚫어 끌여들여 성리학의 말류라 일컬어지던 고루한 조선의 학예를 “완당바람” 돌풍, 즉 실사구시 風潮를 창출, 구축하였다.
    추사의 연경 방문 후의 삶의 전환은 개인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성리학 말류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이를 탈피하고자, 朝鮮化란 명목으로 賤流의 支流로 벗어난 조선 후기의 겉바람 든 천류 학예 문화계에, 書卷氣, 文字香의 淸高古雅한 기풍의 文人的 藝壇과, 支離滅裂한 당대 학계에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토착화가 시도되는 새로운 학풍과 예술사조, 즉 ‘완당 바람’으로 일세를 풍미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후지즈카 치카시는 이를 [秋史 金正喜 硏究-淸朝文化 東傳의 硏究]에서 다음과 같이 논지하였다. [세한도]를 조선땅으로 還國하게 한 학자적 양심, 넓은 도량의 日人학자, 추사에 대한 자료라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수장한 그가 强하고 있는 ‘송학 말류의 조선학계’ 일개의 학인, 추사에게 학자의 양심으로 입에 발린 찬사를 할리가 없고 더욱이, 한국인 후학으로서 이 논지가 蛇足 할 수 없이 명료해 長長한 총설(p25-p88)의 마무리 일부를 발췌하여 옮긴다.


...당시 여러 학자들의 손으로 이식되기 시작한 조선의 실사구시 학문은 마침내 근역 경학의 대종사라고 해야 할 완당 김정희에 이르러 구름을 뚫고 치솟는 늠름한 거목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실로 청조 문화의 핵심을 포착해 經學의 깊은 뜻을 구축한 자는 조선 500년을 통틀어 완당을 제일인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조선 학계는 완당이 나옴으로써 비로소 나라 안팎에 자랑할 만한 자격을 지니게 됐다. 나는 그와 같은 완당을 그려내고자 서막으로 여기에 이르기까지 긴 글을 써 온 것이다. (후지츠카, 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