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10

clara jeon 2018. 6. 21. 19:39


   추사에게는 운대와 함께 나누던 實事求是 平實精詳의 文氣香과 승설차향이 40년이 지나도록 마음 깊이 스며있었으며, 이들의 墨緣의 香은 운대의 두 아들인 常生과 福과의 학문 교류로 이어진다. 추사는 쌍비지관에서 천하의 보배인 [四明元本] , [七經孟子考文補遺], [唐貞觀造像銅碑 ]등의 문집과 古碑를 배관하며, 운대의 南北書派論, 北碑南帖論의 至論을 경청, 운대는 추사의 經義에 대한 학구열과 박식과 총명에 感喜하였다. 이러한 추사에게 집필 중인 [연경실집] 전 6권 중 교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의 [논어]를 논한 책 한 권을 주었고, 또한 무려 245권으로 된 [十三經注疏校勘記] 한질을 膳賜하였다. 이 만남으로 추사를 사숙의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변함없는 스승으로서의 운대의 애정은 추사가 귀국한 후에도 그가 편찬한 [皇淸經解] 1,400권 184종을 아들 상생을 시켜 조선 한양에 있는 추사에게 보내 주었음에도 잠작 할 수 있다. 추사는 완원을 만난 후 그의 호를 阮元의 阮을 차용해 ‘阮堂’이라 하여 완원과의 묵연을 평생 사숙하였다. 실제로 추사는 중년을 들어서서는 추사라는 낙관은 거의 쓰지 않았다.
   추사가 지은 글 중 <適千里說>에는

지금 대체로 천리 길을 가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徑路의 소재를 분변한 다음에야 발을 들어 걸어갈 뒷받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 문을 나섰을 때에 당해서는 진실로 갈팡질팡 어디로 갈 줄을 모르므로, 반드시 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바르고 큰 길을 알려주고 또 굽은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세세히 가리켜주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 그 사람이 정성스럽게 일러주기를,
“그 굽은 길로 가면 반드시 가시밭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바른 길로 가면 반드시 목적지를 가게 될 것이다.”
고 하리니, 그 사람의 말이야말로 성심을 다했다고 이를 수 있겠다.([완당전집]1권,<적천리설>,p68)

秋史에게 芸臺 阮元은 平心精氣 博學篤行의 實事求是적인 학문의 旅程에서 큰 길, 바른 길을 아는 先覺者였고, 항상 마음의 손길이 緣起되어, 추사가 학예의 목적지로 향하는 문을 들어서는데, 空理空論의 空虛를 밟는 등의 先入見을 위주로 하지 않는, 精實함을 극도로 갖춘 性道仁義 길을 안내한 평생을 함께한 성심어린 스승이었다.

(5) 朱學年
    추사는 담계 문하의 埜雲 주학년의 擬陶詩屋를 자주 방문하였다. 야운은 강남성 태주 사람으로 그의 화풍이나 시풍이 전해지지 않으나〈石濤畵語錄〉·〈苦瓜和尙畵語錄>의 저자 石濤를 사숙한 것으로 보아 야운의 학예관을 추정할 수 있다. “法自我立”, “物我一體”, “一筆揮之” 등의 화론으로 明末淸初에 이미 “無定形의 定形”의 선진적인 예술관으로 활동한 석도는 동시대의 화가들과는 다르게 대가의 작품을 모방하거나 영향에 얽매이지 않는 독보적인 개성파 화가, 文筆家로 알려져 있다. 석도는 팔대산인과 같은 한족의 승려가 되었으나, 奇人으로 알려진 팔대산인과는 다르게 전통적인 한족 선비로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으며 개성을 추구한 예술인답게 詩畵에 폭넓은 작법을 구사하였다. 문장서술에서는 儒佛禪을 넘나드는 고풍적이며 심오한 추상적인 언어를 구사하여 일반 학자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워 해설에 異說이 많았다. 이러한 성향의 석도를 사숙한 야운이 학계의 耆宿이자 금석학, 서예가, 경학의 대가인 담계 옹방강 문하생이 되었음은 이미 예정된 학연이었을 것이고, 추사 역시 당시 51세의 야운을 흠모하여 운치있는 의도시옥을 자주 방문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야운은 청년 추사의 風雅한 예술혼과 지성에 매료되었던지, 자신의 서화 솜씨로 그린 由緖깊은 毛西河, 朱竹坨 두 노인의 立像圖와 글씨를 선물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은 아래의 글로 남아있고, 이 글에서의 보담주인은 추사이다.

가경 15년 정월 26일 朱野雲이 西河. 竹坨 두 선생의 상을 꺼내 寶覃主人에게 증정했다. 때마침 이심암, 서몽죽, 옹성원, 주자인, 유삼산이 진돈실에서 이 그림을 함께 보았다.

정성을 다한 야운의 환대와 선물을 받고 귀국 한 추사는 깊은 우정이 담긴 서찰왕래를 멈추지 않았고, 특히 야운은 추사의 탄생일인 6월 3일에는 매 해 술을 걸러 축하하여 그들의 묵연에 성심을 다하여 추사를 감희하게 하였다. 주야운이 도광 14년 1834년 6월 75세의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추사는 어느 해 생일에 야운이 보내준 그림을 보며 다음과 같은 애달픈 시로 우정을 기리었다.

하늘 끝에서 그림 앞에 두고 눈물짓노니,
유월 초사흘 슬픔이 더욱 북받치네.
擬陶詩屋에서의 즐기던 때가 생각나,
허공 멀리 술 한 잔 뿌려 생일을 자축하네.(후지츠카, 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