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9

clara jeon 2018. 6. 21. 19:36

(4) 완원
   완원의 자는 佰元이며 호는 雲臺, 芸臺이다. 강소성 의징에서 태어났으며 건륭 51년 과거에 응시, 55년 진사 급제, 한림원 編修, 大考第一, 少詹에 발탁되었다. 이후로도 완원의 履歷을 보면 평생 몸가짐이 깨끗한 文氣어린 선비의 출세 가도를 볼 수 있는데, 한림원 편수, 내각 학사와 호부, 병부, 예부, 공부의 각 시랑과 산동. 절강의 학정, 절강. 하남. 강서의 순무를 거쳐 양호(호남과 호북 지방), 양광(광동과 광서 지방), 운남, 귀주의 총독을 지냈다. 이어 太子少保, 體仁閣 太學士 역임, 가경 4년과 도광 13년 두 번에 걸쳐서는 會試 總裁,를, 가경 18년 가을 태자 태보에 추직되었다. 86세에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칙령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初志一貫한 그의 학구적인 삶의 모습에 文達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건륭, 가경, 도광 3대에 걸쳐 활동한 운대는 부임하는 곳마다 학문을 장려하고 선비들을 교화하여 50여 년 風懷를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일인자”, 청조학예의 文達로 자리매김한 대문호였다. 經學界의 거봉이기도 한 운대 삶의 전환점 계기는 22세, 1785년 과거에서 제1등 제1명으로 급제 후, 연경의 석학, 홍유들과의 교류한 시기라 볼 수 있다. 그의 識見은 교육 행정에 관한 관료직 전반을 역임하면서 해박해졌으며, 행정의 수반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특히 절강성 재임 시에는 詁經精舍를, 광동에서는 學海堂을 세워 博實한 학문에 정진하는 학생들을 선발해 경학을 익히도록 하여 선비로서의 文氣를 갖추도록 督勵하였다.
    완원은 추사와 만난 1811년 무렵에는 13경 經郛를 편록하면서 國史館 總輯으로 儒林傳의을 편찬하고 있었다. 운대는 이미 조선의 학자, 惠風 柳得恭과 楚亭 朴齊家와 묵연을 맺어 그가 저술한 [考工記車制圖解]가 혜풍에게 인정을 받은 바가 있어, 조선 학자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운대와 혜풍과 학연을 맺은 해가 건륭 55년, 1790년, 운대는 27세, 혜풍은 43세였는데 혜풍은 당시 연경의 학예인들에게 유명인사로 흠모를 받아오고 있었다. 그 이유는 박제가와 이덕무는 1778년 연행을 하였을 때 유득공이 저술한 [二十日都 懷古詩]를 민족적 긍지의 징표로 문인들에게 선물하였고, 이 시집을 읽은 청조 문인들은 讚美激賞을 아끼지 않았다. 더욱이 [二十日都 懷古詩]는 청조 대학자 紀昀이 愛藏한 저서로 당시 양주 팔괴의 한 사람인 兩峯 羅聘은 이 책을 구할 수가 없어 손수 베껴 手稿本을 소장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단군조선의 王儉城, 가야의 金海, 마한의 金馬, 백제의 扶餘 등 부족국가 이래로 수도가 된 적이 있는 21곳의 옛 도읍을 43수의 시로 수록한 이 시집은 조선의 학예를 탐구하는 선비들도 감탄한 歷史懷古 명저이다. 특히 이 시집을 애장한 기윤은 당대 경학의 耆宿이었다. 완원은 기윤과 같은 청의 명현, 석학 등 巨匠鴻儒들이 인정한 혜풍에게서 자신의 저서 [考工記車制圖解]를 상찬 받은 적이 있었으므로 완원은 혜풍과의 이 묵연을 은혜 깊이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담계가 ‘經術文章 海東第一’ 란 극찬하였다는 25세의 조선의 영재가 찾아왔으니, 47세의 완원은 20여 년 전의 혜풍과의 묵연, 은혜를 회고하였음인지, 청년 추사의 비범함을 알아보았음인지 반가움에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고 한다. 운대는 연성공 저택의 서재 泰崋雙碑之館 추사를 맞이하여 희대의 명차인 龍團勝雪茶를 달여 각별히 접대하며 환대하였다. 추사는 茶道에 해박했으므로 승설차의 풍미를 깊이 음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호를 勝雪이라 지어 이 날의 운대의 정성을 마음에 담았고, 귀국 후 40년이 지난 뒤에 음미한 승설차의 향을 평생지기인 權彛齋에게 다음과 같은 글로 남기었다.

차의 품격은 과연 勝雪茶의 남은 향기입니다. 일찍이 雙碑館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맛봤는데, 귀국한 이후 40년 동안 다시는 맛보지 못했습니다.(후지츠카, p183, [완당전집] 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