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6

clara jeon 2018. 6. 21. 19:26

   추사는 1811년 1월(추사연구 2,p218,오류확인) 담계의 제자 李心庵의 안내로 보안사에 있는 학계의 耆宿이자 금석학, 서예가, 경학의 대가인 옹방강을 만났다. 그 당시 그는 금석학에 조예가 깊은 아들 수배, 수곤과 경전 연구에 여념이 없었으며 문하에는 주야운, 서송, 섭지선 등의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세간에는 옹방강의 석묵서루에 수집된 8만 여 점의 고서화, 탁본, 전적 등만을 보고 그를 당대 이 분야에 최대 컬렉터로 학자가 아닌 단순한 수집가라고도 폄하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컬렉터이자 예리한 안목을 겸비한 감식의 제일인자였다.

    당시 나이 79세인 담계는 스승 초정의 형형한 눈빛을 닮은 기백이 충만한 24세인 추사를 초정을 다시 만난 듯 석묵서루의 眞迹· 眞蹟을 拜觀하게 하여 주며 추사의 학문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추사는 그의 시 “慨然起別想 四海結知己 如得契心人 可以爲一死 日下多名士 艶羨不自已”에서의 명사, 옹방강을 만나 자신이 알고 있는 經義, 翰墨의 조예를 물 만난 물고기처럼 풀어 놓았다. 담계는 당대의 청의 학인들이 漢代의 경학에 陷沒되어 있는 반면에 추사의 宋代 철학에 대한 폭 넓고 깊은 박학에 탄식하며, “바다 동쪽 땅에 이 같은 영재가 있었던가”하며 ‘經術文章 海東第一’ 란 극찬을 반절 크기의 글로 써주었다. 담계 학문의 경향이 漢宋不分論의 입장에서 송대 경학에 傾倒되어 있었으니, 추사의 송대 경학에 대한 該博함과 총명함이 자신의 학문의 길에 동행할 수 있음을 耆宿 담계의 慧眼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담계는 추사보다 55년이나 연상이었으나 학문의 길에서 평생 동행할 학연을 감지, 추사와 筆談으로 한묵의 정을 나누었으며, 이후에 펼쳐지는 이들의 학문의 旅程은 한중문화 교류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특별한 만남이었다.

    추사는 옹방강의 저택을 여러 번 방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담계는 학구적인 호기심으로 자신의 학문을 吸入하는 듯 받아들이는 이 慧博한 邊方의 조선청년에게 정성과 애정을 다하여 지도하였다. 훗날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 조선 후기의 금석학과 고증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추사의 前途를 예견한 담계는 석묵서루의 전시되어 있는 眞迹· 眞蹟뿐만 아니라 秘笈까지도 아낌없이 속속들이 拜觀하게 하였다. 이 둘, 물고기와 물의 만남, 격의 없는 듯 한 교감 중에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蘇齋는 元朝에 참깨 위에 ‘天下太平’이라는 네 글자를 썼는데 당시 소재의 나이 78세였다. 글자가 아주 작은데도 안경도 쓰지 않았으니 대단히 기이한 일이다.


옹담계는 매년 1월 초하룻날에는 참깨 위에 ‘천하태평’이라고 쓰는 것이 抗禮였다 한다. 담계와 추사가 만난 때가 마침 1월이었으므로 이 깨알에 각인한 ‘天下太平’글씨를 본 추사는 신기하고 경이롭기도 하였을 것이다.

   담계가 보여준 眞迹· 眞蹟을 배관, 그리고 담계의 所藏品 鑑識에 대한 심혈을 기울인 정성스런 지도, “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역사 같은 金剛眼과 혹독한 세무 관리의 손끝 酷吏手과 같아야 그 진가를 다 가려낼 수 있다”는, 금석학과 고증학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 학문, 鑑識學의 근본을 추사에게 周시켰을 것이다. 훗날 추사가 담계의 수제자 東卿 섭지선과 함께 작품들을 감식을 하여 진가를 가리는, ‘東卿秋史同審定印’이라 각인한 인장을 소유, 이는 담계의 金剛眼, 酷吏手 가르침의 반증이라 볼 수 있다. 담계가 淸朝의 감식의 巨峰이였듯이 추사 역시 감식가의 금강안, 혹리수의 요건을 그의 제자 亦梅 吳慶錫에게 전수하였을 정도로 조선 후기의 특출한 감식안으로 금석학과 고증학을 섭렵한 淸朝學 연구의 주축이 된다.

    연경에 머무는 동안 옹방강의 가르침과 석묵서루에서의 진적 배관으로 인한 開眼, 그 순간순간 깨달음의 감동을 추사는 귀국 후 후일담으로 남겼다. 다음은 연경방문 후 개진한 추사 학문의 심중이 표현된, 담계가 추사에게 증정한 <宋拓化度寺故僧邕禪師舍利塔銘> 稀貴 模刻本에 쓴 추사의 발문이다. 이 글을 읽어 보면 짧은 일정이었지만 담계의 가르침에서 開眼한 추사의 入,法古, 實事求是的 학문의 성향과 그리고 귀국 후에 감식의 기초와 학예에 대한 視線의 跳躍, 금석학, 고증학자로서의 금강안적인 감식가의 안목을 다져가는 학구열을 볼 수 있다. 이 글은 앞으로의 추사의 확고한 正路의 학문 경향을 연구하는데 있어 有意味한 자료이므로 전문을 발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