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 사랑채

燕京 見聞(연경에서 만난 스승&학우)-8

clara jeon 2018. 6. 21. 19:31

(3-2) 석묵서루
   담계의 寶庫인 石墨書樓에 수집된 진적들과 그 외 수장품은 8만 점이나 되었다 한다. 청의 학인들도 마음이 흔들리고 눈이 현란해지며 감상하는 원전들, 석묵서루의 8만 점을 배관하며 조선이라는 변방에서 온 초정과 추사는 감동, 감격하였다. 서예에 일가견이 있다는 이들이 구양순 글씨의 化度寺碑 진본 등 수많은 眞迹·眞蹟을 拜觀 하였을 때의 벅차오르는 개안을 초정은 다음과 같은 시로 기록하였다.

담계학사는 동파에 깊이 빠져,
서재에 笠屐圖를 걸어두었다.
금석의 숲 속을 걸어 들어갈 때,
개미가 아홉 구비 구슬을 뚫고 간 듯하다.(후지츠카, p153)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유물이 22만 점이라고 하는데 개인의 집에 8만 점을 소장하고 있었으니, “금석의 숲 속”을 들어간 듯 하였을 것이다. 석묵서루의 대단한 규모에 대한 글을 담계의 제자인 錢泳은

도서 문적이 서가에 빼곡히 꽂혀 있어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마치 수만 송이 꽃이 피어 있는 계곡 속에 들어간 것 같아 마음이 흔들리고 눈이 현란해져 이야기를 나눌 겨를조차 없다.(후지츠카, p151) 라 감탄하였다.

    학문을 연구하는 길에서 見學은 연구자, 학습자가 일상에서 보는 물상들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이 연구, 학습하던 실체를 實在로 접하는 기회로, 현재 삶의 일상과 밀접하게 緣起되어 있는 이 물품들에 배어있는 역사의 軌跡과 창출한 이들의 정신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류할 수 있다. 이 신기, 신비로운 관람은 연구, 학습자에게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색다른 체험과 함께 그들의 학문을 실재하게 하며, 시야를 확장시켜주어 연구하는 학문의 영역을 확장하여 준다. 석묵서루의 도서 문적, 古碑, 古錢, 탁본들은 당대 경학, 금석학, 고증학을 연구하는 학예인들의 도서관, 박물관 역할을 하는 寶庫였다. 이곳을 견학한 학자들은 耆宿 담계의 학문 기틀이 되고 있는 眞迹·眞蹟을 拜觀하고, 이 작품들에 담겨있는 작가의 履歷을 들으며 자신들의 학예의 길을 切磋琢磨 精進의 다듬질을 하였을 것이다.
    석묵서루에서의 학자들의 見聞은 단지 감상만을 하거나 자신의 학문 연구 자료로서의 효용성 가치만을 위한 관람은 아니었다. 이들은 작품에 대한 讚美激賞을 글로 서로 나누었으니, 시와 산문으로 표출한 이들의 贊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작품 감상문의 궤적이 되어 후학들에게 작품의 이력, 작가의 성향과, 글쓰기 경향을 연구하는 학예인에게 중요 자료가 되었다. 한 예로 蘇東坡像에는 담계의 찬문을 볼 수 있는데 蘇齋의 동파에 대한 존경과 사숙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담계는 명나라 정덕 13년, 1518년에 唐寅이 그린 [소문충공입극도]에 300여 년 후에 다음과 글로 찬 하였다.

이 초상화는 粤東에서 그린 것인데 당시 막 嵩陽帖을 얻어서 안개 낀 조각배 위에 실었다. 그로부터 27년 뒤에 소재 안에 공양하였다. 그리고 <偃松屛讚>과 [施顧注蘇詩]를 얻어 함께 모시니 옥빛 무지개가 피어올라 드넓은 소맷자락에 큰 바다 장대한 바람이 걸쳤다.
건륭 을묘년(1795) 가을 8월 3일에 보소실에서 다시 장정을 하고 삼가 贊을 쓰다. 옹방강인.(후지츠카, p168)

담계는 동파 탄신일인 12월 19일에는 동파상 3점을 그의 서재 寶蘇室에 걸어놓고 동파를 사숙하고 있는 그의 동료, 제자들과 함께 제사를 지낼 정도로 소동파를 흠모하였다. 그는 서재 이름을 ‘寶蘇齋’라 지었는데 “소동파를 보배롭게 받드는 서재”라는 뜻이다.

또한 소재는 吳漁山이 강희(1684)에 그린 <동파입극도>을 자신이 임모하고 다음과 같은 찬문을 남겼다.

동파상에는 吳 지방에서 진영이라고 전하는 <관자본>이 있고 이백시의 <磐石筇杖醉態本>이 있고 조자고의 <硏背笠屐本>이 있다. 이것은 모두 근거가 있다. 이 본은 賈春波에게서 나온 것으로 700년 전이 神韻이 깃든 것이라며 소재가 고증하여 쓴다. 硏圖庵 쓰다.(후지츠카, p170)

   추사가 석묵서루에서 본 그림은 동파탄신일에 담계가 벽에 걸어놓고 제사를 지내는 애장품 <同派像雨雪詩本>이었다. 탄신일에 제자들을 모이게 하여 제사를 지낼 정도로 사숙하는 스승 담계의 모습에 추사 역시 깊이 동파를 흠모하였다. 훗날 추사의 제자인 소치 許維 역시 완당의 제주 유배시절 모습을 소동파의 입극도를 번안한 추사의 초상화 <阮堂先生海天一笠像>를 그렸고, 유숙은 <동파 입극도>를 임모, 조선 학자들 사이에서도 소동파를 사숙으로 흠모하는 의미상징으로 애장하게 된다. 소동파상을 한 예로 傑作에 스며있는 靈感의 공명감은 개인과 개인의 知的인 유대감은 물론 시공을 초월한 지성과 감성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석묵서루에 소장되어 있는 8만 여점의 수장품이 청조, 조선 후기 詩 ,書. 畵 .文 史. 哲 학예에 공헌한 여파를 짐작할 수 있다.

   석묵서루에서의 추사의 견문의 靈感은, 이미지는 그의 평생동안 창작활동의 창조 에너지로, 자신의 靈蹟. 靈的 그림자로 각인된 잔영들로 그의 작품들에 투영되었을 것이다. 그 印象이 얼마나 강렬하였는가는 다음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글은 조선조의 詩書畵 三絶 대가로 칭송된 완당의 제자인 자하 신위가 1812년 서장관 入燕할 때 餞別詩이다.


자하 선생이 만리를 지나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瑰景과 偉觀이 수천 백억도 더 될 줄 알지만, 그 모든 것이 蘇齋老人 한 분 뵙는 것보다 못하다고 여겨진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偈를 說하기를, 세계에 있는 것을 다 보았으나 그 모두가 부처님 한 분보다 못하다고 하였는데, 나 또한 선생의 이번 연행에 이와 같이 말하고 싶다.([완당평전]1,p121-122)


세계의 문물을 다 견문을 한다 한들 옹방강과 석묵서루의 진적과 진본을 배관 했을 때의 그 감동, 감격 더 이상이겠는가, 연경에서의 추사의 明若觀火 行步가 행간과 행간 사이에 含意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